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과거 이만재 씨는 ‘막 쪄낸 찐빵’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거듭남에 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일은 별일이다. 세상에 나처럼 한평생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오로지 술과 법과 객기를 인생의 낙인 양 믿고 살았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참으로 갑자기. 좋은 술벗들 대신에 예수님 사랑해요. 어쩌고 저쩌고를 웅얼거리며 다닌다. 이 세상에 보이지도 않고 이전에 한 번도 본 일도 없는 먼 나라 목수네 털보의 아들을 은근히 속으로 짝사랑하기 시작하다니.ᆢ”
그렇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세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는 변화, 이런 변화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며, 무신론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부인하는 것이 교만이듯,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요, 존재론적 변화요, 영적인 변화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시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리면 누구나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가정과 일터와 사회를 변화시키며, 주위의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 변화는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가 아닌 신비로운 변화입니다. 애벌레에게는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방해물이고 고난이고 문젯거리입니다. 앞에 있는 작은 돌덩이도 문제고 나뭇가지도 문제고 작은 알갱이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면 이 모든 고난과 문제들이 더 이상 고민이나 문젯거리가 되지 않듯이ᆢ
사람도 다시 태어나 거듭나면 전과는 생각과 의식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태도와 행동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진통이 뒤따릅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자신을 내려놓고 소중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역경의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터널을 빠져나가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내지 못하면 나비가 되어 날아 보지도 못하고, 영영 애벌레에 머물고 맙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애벌레였던 내가 나비가 되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거듭남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나의 축복을 나 혼자 누리지 말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지 않으시렵니까?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많은 열매가 열리길 기대합니다. 전도의 열매,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 열매 맺기를 기대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복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글│김상근 목사(선교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