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황권위의 급성장 

군웅할거 하던 정복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세력판도가 형성되어 중세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의 주역은 프랑크 족이 담당하게 되었다. 프랑크의 클로비스(Clovis)왕이 496년 정통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로마교회는 중세사회의 막강한 정치적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등장한 클로비스의 메로빙거 왕조는 교회에 무관심 하였다. 오히려 교회재산을 착취하고 토지를 몰수하였으며 교회분란을 조장하였다. 

교회를 탄압하고 기독교 신앙에 무관심 하였던 메로빙거 왕조는 정치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궁내대신 피핀(Pipin)이 메로빙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3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대의 막강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피핀은 통치권자로서의 사회적 도덕적 승인을 얻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 

피핀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왕조를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른다. 

카롤링거 왕조는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중세사회의 무적의 왕조를 형성하였다. 때마침 로마교황청은 카롤링거 왕조에 윙크를 보내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성상예배논쟁 때문이었다. 서방교회는 야만족들의 종교문화를 융화하고 수용하기 위하여 성자유물숭배와 더불어 성상예배가 공식적으로 허용 승인되었다. 성상예배는 그 시대 예배의식의 하나로 토착화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지역은 동방교회이었다. 동방교회의 배경과 원래 문화의 토대가 희랍적이어서 모든 일들을 철학적으로 사고하며 논리적인 분석을 잘하였다. 더욱이 동방지역에 침투하여 온 마호멧 교도들의 공격이 무척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회교도들은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격하였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 안에 그림과 형상을 두고 예배를 드리고 있으므로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동로마 황제 레오3세가 성상예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그레고리3세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성자들의 성상을 파괴하거나 훼손한 모든 자들에게 파문을 내렸다. 결국 이문제로 인하여 로마교회는 동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롬바르드족이 호시탐탐 로마의 교황청에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 하여 위협하고 있었다. 

교황 스테판3세는 이때 카롤링거 왕조의 난쟁이 피핀왕(피핀의 손자)께 구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 요청은 피핀 왕으로서도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쿠데타로 설립된 왕조의 정통성 문제로 고심 중에 있었던 카롤링거 왕조는 정통적인 왕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로마교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교회의 영적권위와 도덕적 승인을 얻을 수 있기에 기꺼이 원정을 와서 롬바르드족을 쳐부수게 되었다(774- 777). 서로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카롤링거 왕조는 제국의 확장과 정통성을 확보하였고 로마교회는 그 권위가 급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가 동시에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William Ragsdale Cannon, 76-97. )

2. 신성로마 제국의 출현

로마교회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800년 크리스마스 날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성직자들, 영주들 과 귀족들 기사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군중으로 성당의 광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찰스 황제는 교황 레오3세에 의하여 황제의 관을 받게 되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 행사였다. 

신성 로마제국 출현의 정치적 의미는 대단하였다. 그 옛날 영광스러운 서방세계의 회복을 뜻할 뿐 아니라 신정정치의 확인을 의미함도 내표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 엄청난 대관식 행사는 미리 사전통고 없이 진행되었다. 만약 이 행사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찰스 황제가 거절했을 것이다. 찰스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한발자국도 결코 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3세가 이런 행사를 주도한 숨은 동기가 있었다. 프랑크 왕국과의 결탁으로 로마교회는 정치적인 독립과 영적권위가 신장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끊임없는 세속권력의 도전이 잠시 동안 일지라도 교회의 권위를 하락시키곤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로마교회는 세속권의 도전을 차단시킬만한 중대한 정치적 종교적 축제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레오3세의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교황 레오3세가 행한 행위를 찰스나 그의 후계자들이 무효화 시킬 수는 없었다. 레오3세는 중세인들에게 황제의 제관은 교회의 선물임을 확신 시켜주었다. 이제 교황의 권위를 흔들자는 없게 되었다. 찰스대제 이후 중세사회는 봉건제도가 보편적인 사회구조로 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백성들 은 혼란과 무질서의 전쟁기간 동안에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하여 봉건제도는 형성될 수 있었다. 그들은 생명을 보호받기 위하여 귀중한 자유를 포기하였다. 자신들의 노동력과 모든 것들을 부유하고 강력한 봉건지주에게 넘기게 되었다. 

봉건사회 구조가 정치와 종교에 함께 이용되어 중세는 보편교회, 보편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영향력 있는 제왕이 그 통치의 수단으로 종교와 결탁할 때 그 사회전체는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 볼 때 단일한 종교체계에 의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획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Mediaeval Christianity: A.D. 590- 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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