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조의 후예인 카롤링거 왕조가 중세의 패권을 잡게 되자 중세사회는 안정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3세가 그에게 신성로마 제국의 관을 씌운 동기는 교황권위의 상승에 있었다. 그러나 찰스 자신에게도 중세사회의 최고의 지도자로서의 상징적인 의미 부여가 되었다. 

이제 중세사회에서 찰스대제(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를 무너뜨릴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로 뿐 아니라 교회사적인 업적도 남겼다. (“샤를마뉴는 ‘샤를’이라는 이름에 ‘마뉴’라는 존칭이 붙은 이름이며, 샤를은 독일어로 카를, 라틴어로 카롤루스, 영어로 찰스와 같은 이름이다.” 남경태, 『종횡무진 역사』)

1. 기독교 선교에 공헌 

찰스대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정진하였다. 그의 선교확장은 국가세력의 확장과 정비례하였다. 군사적인 원정의 동기가 항상 선교의 명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등 전 유럽을 다스렸다. 그의 선교방법은 마호멧과 비슷하였다. 정복지 주민들에게 무력으로 신앙영접을 강요하였다. 서방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주민들이 기독교 세례와 죽음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기독교 절기동안에 금식하지 않는 자 역시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와 같은 그의 선교정책은 782년 삭소니 지방에서는 법령으로 까지 제정하여 무력을 동원한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와 같이 적극적으로 강요된 선교 후에는 체계적인 교육을 시켰다.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2. 정통신앙의 옹호자로서의 찰스대제 

찰스대제는 선교뿐만 아니라 정통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지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통치 무렵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이단운동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다. 그는 단호하게 이단운동을 근절시켰다. 사벨리우스주의를 배척하였다. 당시 사벨리우스주의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다윗은 성부,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바울 사도는 성령님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명백한 양태론으로 배척되었다. 그 다음 양자론도 제기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성으로는 양자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성령론에 있어서 니케아 신조에 빠졌던 부분을 강화시켰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었다(filioque=and from the son)는 조항을 삽입하는데 동의하였다.

3. 학문연구의 부흥 

찰스대제 시대를 가리켜 카롤링거의 문예부흥이라고 일컬을 만큼 그는 교육에 치중하였다. 그가 교육에 깊은 관심이 있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출중한 학자들이 모여와서 훌륭한 제안과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영국의 최고의 지성인인 알퀸(Alcuin)을 만나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고 평생 친구가 되었다. 교육 문제에 관한한 전반적으로 그의 의견을 청종 하였다. 그 결과 유럽 최고의 상아탑이 된 파리대학의 모체인 궁정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찰스대제의 교육적 업적이 훌륭한 것은 귀족과 농노 누구를 막론하고 교육을 받도록 법령을 제정한 데 있다(789년의 칙령). 그의 뜻을 받들어 전체 백성들이 헌신적으로 교육을 받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이 요하였지만 그러한 발상과 정책자체가 큰 의미를 주고 있다. 자유민·농노들의 자녀가 교육받는 초등학문에서는 대수입문, 초등문법, 시편, 그레고리 성가 등을 가르쳤다. 

성직자 후보생들과 귀족의 자녀들은 성당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등 교육을 받았다. 교과목은 문법, 수사학, 수학 등으로 구성되었다. 교수 방법은 고대 사본을 낭독하고 복사하며 암기하였고 내용과 스타일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교수들의 강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학교의 명성은 교수들의 수준과 소유한 사본들의 숫자와 질에서 결정되었다. 

찰스와 알퀸은 학교는 결국 교회의 현관에 불과하며 인간의 학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이르기 위한 예비적 단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브루스 셀리,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4. 교회의 개혁 

찰스대제 치하에서의 교회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나는 교회의 관리와 치리와 관련된 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도원 운동의 개혁이었다. 

(1) 교회의 관리와 치리에 관한 개혁 

중세사회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였으므로 자발적인 헌금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산수입이 많았고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다. 많은 재산을 지닌 교회는 타락하기 쉬웠으므로 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찰스대제가 단행한 교회의 개혁은 다음과 같다. 

① 신자들에게 과중한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여 가족들이 빈궁에 빠지는 사례들을 금지시켰다. 

② 교회의 수입은 주교, 사제들, 해당 교구의 빈민들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③ 성직 안수식, 장례식, 특별미사 등의 경우에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것이 좋으나 강제징수는 하지 않아야 한다. 

④ 유산을 기증 받았을 경우 교회는 반드시 기증자의 뜻대로 사용하여야 한다. 

⑤ 십일조는 정액대로 바쳐야 한다. 

⑥ 교회는 소속재산이 궁극적으로는 빈민들에게 속한 것임을 잊지 말고 병자와 빈민들, 그리고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들을 건축해야 한다는 것 등이 있다. 

(2) 수도원운동의 개혁과 부흥 

찰스대제는 즉위 당시 수도원들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정복전쟁 당시 원조의 대가로 프랑크 귀족들에게 많은 전리품이 주어졌는데 그 중 일부 재산들이 수도원에 바쳐졌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수도원을 떠났고 그 대신 병역기피자와 범죄자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수도원들은 이단들의 본거지 또한 향락의 소굴로 타락하였다. 

수도원 개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① 성직자들의 주거를 제한하여 유랑성직자를 금지시켰다.
② 철저한 기숙생활이 강요되었다.
③ 공동으로 낭송하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경건생활의 훈련을 시켰다.
④ 목회와 교육 및 공부에 치중케 하였다.
⑤ 철저한 겸손의 생활을 준수케 하였다.
이와 같은 수도원 개혁운동은 외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내부로 부터의 개혁에 의하여 수도원이 부흥되기 시작하였다. 베네딕트수도원은 자발적인 개혁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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