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자군 전쟁과 배경 

기독교가 신앙탄압을 받았던 초대교회에서는 순교를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획득된 기독교 국교시대 이후 성도들의 신앙의식은 성지순례와 성자유물 숭배 등으로 전환되었다. 중세에 들어와서 로마교회는 성지순례를 공로축적의 업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부터 성도들은 앞을 다투어 성지순례를 열망하였다. 그 당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신앙의 지적인 수준은 사도신경이나 십계명, 주기도문을 암기하는 정도에 그쳤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대신 성례의 신비적인 힘, 고행주의의 이상, 성자와 그들의 유물숭배, 그리고 성지순례이었다. 

그 중에서도 성지순례는 천국에 확실하게 들어가는 보증수표와 같은 업적으로서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꿈이며 간절한 열망이었다. 성지 예루살렘이 638년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후 순례에 불편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아랍인들 역시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순례자들을 관광객으로 대접하여 돈도 벌었고 대신 기독교인들의 자유로운 순례는 보장이 되었다. 

성지가 1075년 셀주크 트루크인(Seljuk Truks)들에게 넘어간 다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들은 돈을 원치 않았다. 노골적인 성지순례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가 로마 교회에 터키군을 견제시켜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반2세는 성지탈환을 위한 호소와 십자군 동원을 선포하였다. 교황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전사하는 자들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의 티켓을 받게 된다고 약속하였다. 

십자군 전쟁에 지원하는 자는 감옥의 죄수까지도 석방시켜서 십자군에 가담시켰다. 유럽의 전지역에서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 십자군 전쟁은 시작 될 수 있었다. (R. Dean Peterson, A Concise History of Christianity)

2. 십자군 전쟁의 진행 

(1) 제1차 출정(1096-1099) 

교황 우르반2세의 주창에 프랑스 왕 갓프리(Godfrey)가 주력부대를 인솔하고 떠났다. 40만 대군을 이끌고 성지회복에 성공하였다. 그곳에 라틴왕국을 건설하고 88년 동안 지속되었다. 동방황제와 교회의 요청으로 시작된 십자군 1차전쟁의 결과는 성지에 로마교회를 세움으로서 동·서 교회 분리를 더욱 악화시켰다. 

(2) 제2차 출정(1147-1148) 

2차 전쟁은 십자군의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주요한 원인은 동방교회들이 외면하였기 때문이었다. 2차 전쟁이 패배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라틴왕국이 명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터키 군대의 내분 때문이었다. 

(3) 제3차 출정(1189-1192) 

영국의 리챠드(Richard)왕과 독일의 프레데릭(Frederick)황제와 프랑스의 필립(Philip)왕이 거느린 3국 연합군이 출정하였다. 독일왕은 실리시아에서 익사하였고 프랑스의 필립은 자국의 정치문제로 귀국하였다. 영국왕 리챠드는 3년 동안의 싸움 끝에 협상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협상의 결과 순례자의 보호와 세금면제의 혜택은 받았으나 실상은 실패한 원정이었다. 

(4) 제4차 원정(1202-1204) 

교황 이노센트3세의 주창으로 볼드윈(Balwin)이 지휘하였다. 성지 탈환은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비잔틴제국의 1/4은 라틴황제가 차지하고 3/4은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의 봉토와 후원한 베니스 상인들의 몫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사라지게 되었다.

(5) 제5차 십자군(1212년) 

주로 소년들로 구성되었다. 목동 스데반이 수천 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도중에 흩어지고 대부분 포로가 되어서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6) 제6차 십자군(1227-1229) 

독일 프레데릭2세(Frederick II)가 성지에 도착하여 싸우지도 않고 협상을 맺고 끝났다. 

(7) 제7차 십자군(1248-1270) 

프랑스 왕 루이스9세가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출정했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8) 제8차 십자군 

영국왕 에드워드1세(Edward I)가 원정에 나서 나사렛을 점령하고 성지순례의 길을 열었으나 1291년 나사렛의 최후 점령지가 상실되고 말았다. 

3.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결과 

(1) 교황의 세력이 강화됨 

십자군 전쟁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세속의 권위 위에 있음을 입증시켰다. 출정한 군인들의 재산이 전사 시에 교회에 귀속됨으로 교회는 권력뿐만 아니라 부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일시적인 교회의 번영은 타락과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봉건제 사회구조의 붕괴 

십자군 전쟁으로 피라밋 구조의 보편사회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신흥 중산계층의 출현으로 영주들의 기득권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서서히 민족국가가 출현되기 시작하였다. 

(3) 해운과 무역의 발달 

중상주의의 발흥은 무역과 상·공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도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4) 스콜라 철학과 대학의 설립 

십자군 전쟁은 동·서 문물교류의 혈맥이 되었다. 동방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랍의 자연과학이 서방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스콜라철학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전문직 연구가 활발하게 촉진됨으로 대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5) 수도원 운동 

급변하는 사회의 변화는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영적 누룩 운동으로 수도원 운동이 확대되어 수도원은 성직자들의 개혁과 이상을 제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은 무거운 관습을 가진 전통적인 베네딕트 수도회는 비판되었다. 단순하고 엄격하게 시행되는 금욕과 청빈을 요구되었다. 수도원 규율을 철저하게 고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새로운 수도원은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 order), 시토 수도회(Cistercians)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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