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레고리7세의 개혁운동 

23년 동안 은둔하면서 경건한 수도사 생활을 하던 힐데브란트를 추기경단이 공식적으로 교황을 선출하기도 전에 로마의 시민들이 직접 뛰어들어서 교황으로 추대하였다. 자신은 적격자가 아니라고 고사하였다. 군중들은 억지로 힐데브란트를 잡아 가지고 성 베드로성당으로 끌고 가서 교황에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1073년 5월 22일) 그는 사제 임명을 받았고, 6월 30일에는 주교로 임명되어 교황에 취임하였다. 

교황 그레고리7세는 기독교회 전체의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비상한 개혁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교회의 타락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다음 두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자질과 도덕적 부패이며 두 번째는 평신도들에 의한 성직수임으로 세속권력의 영향이 교 회를 좌지우지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중세시대의 교회적 나폴레옹과 같은 과감한 결단력을 가지고서 1074년 3월 개혁회의에서 지침을 발표하였다. 

① 성직을 돈으로 매입한 성직자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도 성직을 감당하기에는 무자격자이다.
② 교구를 맡기 위하여 금품을 증여한 교직자는 자신의 교구를 상실하여야 한다.
③ 간음죄를 범한 교직자는 즉각 신부로서의 기능과 사역을 중단시킨다.
④ 무엇보다도 교인들 스스로가 성직매매와 도덕적 타락에 관한 교황의 칙령을 위반하는 성직자들의 목회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개혁의 칙령 그 자체는 좋았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이유인 즉 서유럽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개혁지침을 반대하여서 평신도들에게는 교황의 칙령조차도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2. 세속권력의 반발과 교황권위의 상승 

독일의 젊은 왕 하인리히4세는 처음에는 교황에게 고분고분하였다. 색슨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언제까지나 교황에게 순종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제 막 왕권을 잡은 하인리히4세로서는 자파의 세력을 확장해야 그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밀란의 대감독을 임명하였다. 이에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7세는 1076년 2월 22일에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킴과 동시에 폐위시키고 말았다. 

민심은 동요되기 시작했고 충성을 맹세했던 제후와 감독들도 대세에 편승하여 교황 편에 서게 되었다. 이에 황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황을 찾아가서 파문을 용서하여 달라고 비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교황은 깊은 산속 카놋사성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 교황은 사죄를 구하러온 헨리4세의 면회를 거절하였다. 

헨리는 황제의 권위도 집어 던져 버리고 스스로 회개하는 평신도의 모습으로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려 자비와 용서를 간구하였다. 사흘 밤낮으로 맨발로 눈밭에 엎드려 눈물의 참회를 하는 순간이야말로 교황의 권위가 최고 절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가? 교황이 임명해야 될 성직자를 황제가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랜 중세역사의 관행이었는데 왜 교황은 이 문제를 그토록 중대사건으로 확대하였는가에 관심을 집중시켜 볼 필요가 있다.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음행 등 중세교회 타락의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제공이 바로 평신도들이 성직을 수임하는 데서 발생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그레고리7세의 교회개혁의 강한집념과 의지의 산물이 “카놋사의 굴욕”사건을 만들어내었다. 표면적으로는 교황이 승리하는 듯하였다. 교황은 권위에서는 승리하고 정치에서는 실패로 종결되고 말았다. (롤란드 베인턴)

3. 수도원 개혁운동 

“암흑의 시대”로 일컫는 중세사회 수도원은 문화와 신앙의 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중세교회가 타락하는 무대가 수도원이었다. 중세 수도원이 타락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가 존경을 받게 되므로 부자들이 천국시민의 확실한 보증을 얻고자 토지와 재산을 앞을 다투어 수도원에 기증하였다. 십자군전쟁에 출정한 병사 중에서 전사자들의 재산이 수도원에 귀속하게 됨으로 수도원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고 타락의 본산지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후 수도원은 스스로 거듭나기 시작하였다. 개혁운동의 중심으로서 영적누룩운동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영적누룩운동으로 개혁에 앞장섰던 수도원들은 다음과 같다. 

(1) 클루니 수도원 

성직매매를 철저히 금지하고 성직자의 도덕적 기강을 확립하였다. 엄격한 규율로 경건생활에 힘썼으며 영주들의 전쟁에도 중재역할을 감당하였다. 

(2) 시토 수도원 

주로 농부와 빈민출신의 수도사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들은 학문적인 활동보다는 명상에 힘썼고 절제와 금욕생활 그리고 농사와 노동을 강조하였다. 

(3) 클레르보 수도원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버나드의 지도아래 겸손의 미덕을 강조하였다. 지도자 버나드는 감화력있는 설교자로도 유명하였다. 

(4) 수도단 운동 

개혁적인 수도원 운동을 거리로 옮겨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하며 생활화하였다. 학자를 많이 배출한 “도미니크 수도단”의 특징은 “연구하고 전도하라”이다. 걸식, 청빈, 설교, 봉사, 이웃사랑에 힘썼다. “프랜시스 수도단”의 3대 강조는 빈곤, 독신, 순종이었다. 잘못 된 의식과 교리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도적 단순성과 온유한 인격형성에 주력하였다. 특별히 수도원과 수도단의 개혁운동은 훗날 종교개혁 운동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모판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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