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 6:2)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 사회와 생활에 미친 충격파는 매우 큽니다. 거의 핵폭탄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과거에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원칙들이 뒤집히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말이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의 역사와 삶의 자리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속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비대면이 미덕 내지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적으로 매우 큰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현대 사회는 공동체의 붕괴라는 위기 상황에 노출된 터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난세일 때 더욱 뚜렷해집니다.
난세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그것이 함께 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즉 서로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이순신 장군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이 코로나 시국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비록 공중보건이라는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흩어질 필요성이 요청되지만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연대의 끈인 ‘서로 함께’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난세를 극복하는 동력이며 공동체를 보존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영화배우요 유엔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약했던 오드리 햅번 여사는 “생의 한 가운데서 붙잡아야 할 최고의 것은 서로”라고 했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아마 서로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서 교회 또한 자유롭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라는 초유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성이 상당히 훼손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라는 용어를 참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라는 말은 ‘함께’, ‘같이’라는 공동체 용어입니다. 그 내용이 모두 교회 공동체를 목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로 화목하라(막 9:50),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서로 우애하라(롬 12:10), 서로 존경하라(롬 12:10),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롬 12:16), 서로 비판하지 말라(롬 14:13), 서로 받으라(롬 15:7), 서로 문안하라(롬 16:16),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서로 짐을 지라(갈 6:2), 서로 용서하라(엡 4:3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엡 5:21),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 10:24) 서로 비방하지 말라(약 4:11), 서로 원망하지 말라(약 5:9)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라(약 5:16),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 5:5) 등 참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가 중요하다는 반증이며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우리 역시 난세를 살면서 ‘서로’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꼭 붙잡아야 할 끈은 바로 ‘서로’입니다. 비록 비대면 시대에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더욱 끈끈한 연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중보기도하면서 영적인 교통과 영적인 꿈과 이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가운데 한 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함께하는 그곳에 주님도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서로 함께해야 할 이유가 있고, 이 난세를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적 유대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영적인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이 시련의 때에 서로의 끈을 꼭 붙잡고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글ㅣ조장환 목사(평창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