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의 모체가 되는 학교들 

본격격인 대학교육은 십자군 전쟁이후인 12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규모나 교육제도에 있어서 일정한 체제는 갖추지 못했지만 교대 희랍이나 로마, 또는 중세초기와 중기의 수도원을 중심한 교육기관이 있었다. 유스티니안 대제 때까지 아테네는 학문의 중심지이었다. 희랍과 로마시대 인기 있는 교과목은 수사학과 웅변술 등이었다. 중세중반기까지의 수도원 교육은 주로 수도사 지망생 중심의 성직자 훈련소에 불과하였다. 

대학교육과 차이점을 들자면 이들 고대 교육은 교수과목 및 수업년도, 그리고 학위의 수여 등이 표준화 또는 조직화되지 못했다는 점이 다. 고대 교육에 있어서의 모든 초점은 오로지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 중심의 교육이었다. 교사가 있는 곳이 바로 학교였으며 교사가 상황에 따라서, 또는 교사의 의도에 의하여 가르치는 과목이 교과목이었다. 교사가 학생을 곁에 두고 가르치는 기간이 수업연한이었다. 

중세 중반기 찰스대제 때부터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본격적인 체제는 갖추지 못하였지만 일반학교와 궁정학교 및 교회학교(즉 수도원) 교육으로 세분화되기 시작되었다. 

이때가 카롤링거의 문예부흥인데 궁정학교와 교회교육이 훗날 중세 대학교육의 모체로 볼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 초등교육은 자유민과 농노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으로 문법, 시편, 그레고리성가, 대수입문이 주요 교과목이었다. 고등교육은 주로 수도원과 궁정학교로서 귀족의 자제와 교회지도자 양성과정이었다. 고등학교의 주요한 교과목으로서는 문법, 수사학, 수학, 고대사본 낭독 등이었다. 수업년도, 교육의 질과 학위수여 등이 표준화 되지 못했으므로 대학교육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미흡하였다.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2. 본격적인 대학의 출현과 교육과정 

(1) 대학출현의 배경 

십자군 전쟁은 정치, 사회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성계에 까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었다. 서방제국이 야만족의 침입과 찬탈로 어두움의 역사를 보내는 동안 동방의 아랍세계는 계속적인 과학 과 철학연구의 발전이 있어왔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아랍의 문화가 계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희랍의 고전들이 혈맥이 흐르듯 십자군의 이동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서방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중세 사회는 이러한 정신사의 전환기에서 보듯이 몰려드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좋은 예로 1215년에 모든 성당들은 교사(또는 교수)를 위하여 최소한 봉토 하나를 배정해 주도록 교회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2) 대학의 운영과 교육과정 

대학을 지칭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란 단어는 원래 상업 거래에서 사용하는 용어였다. 이 단어는 길드 또는 상인들의 집합체를 의미하였다. 마치 예비장인들이 어떤 고도의 수준의 숙련공이 되기까지 길드에 있어야 함과 같은 원리였다. 교수는 전문적인 학문분야의 도 제들로서 학생들이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도제인 교수 밑에 일 정한 기간, 일정한 교과목을 전수받고 훈련받아서 목표 달성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자격증 즉 학위를 받고 학교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학과 길드의 구조적인 유사점을 이해 할 수 가 있다. 

중세 대학교육의 과정은 지금처럼 학부(undergraduate)와 대학원(graduate)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학부에서는 Trivium(삼학)-문법, 논리, 수사학을 마치면 학사학위(baccalaureus)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Quadrivium(사학)-음악, 산수, 기학, 천문학을 이수하면 석사학위(Magister)를 받았다. 최고의 과정인 박사과정에 진학하면 전공에 따라서 신학(=철학), 법학, 의학으로 나누어져 전공과목을 연구한 후에 자 격시험을 치룬 후 전문분야의 박사학위(Dominus)가 주어졌다. 

교수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구두시험인 공개논쟁과 강의를 포함한 엄격한 시험에서 인정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서적은 엄청나게 고가이었다. 가장 저가의 책이 교수의 일년 수입에 해당하였다. 당시 뛰어난 도서관중 하나인 클루니사원이 13세기 초 570권의 서적을 보유하였고 가장 큰 도서관을 자랑하는 켄터베리 도서관이 5천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책이 이처럼 고가이고 희귀했던 이유는 당시만 하더라도 인쇄술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련된 필기사가 성경 한권을 베끼는데 일 년이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세시대 학문의 보편적인 도구는 암기였다. 학사운영은 철저하게 자치제도 즉 길드로 진행되었다. 교수 중심의 학교로는 신학의 중심이었던 파리대학이었으며, 학생길드의 대표적인 학교로는 최고의 법과대학을 자랑하는 볼로냐대학이었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he Middle Ages)

(3) 중세대학의 의의 

대학교육 이야말로 중세사회가 근세사회에 남겨준 가장 값비싼 소중한 유산이었다. 중세의 대학은 어둠의 시대였던 중세의 막을 내리고 새역사 창조의 선구자인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는 지성의 산실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은 자연과학과 스콜라철학의 거성들을 배출했으며 살레르노대학은 의과대학으로 명성이 높았고 톨레도대학은 동양학의 교수진으로, 볼로냐대학은 최고의 법과대학으로 중세말기와 르네상스의 지성적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학문의 산실이었던 중세의 대학은 종교개혁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파리대학은 중세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의 본산지로 그 업적이 지대하다. 13세기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중세 신학연구에 심장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위대한지도자 칼빈을 비롯한 유수한 종교개혁의 인물들이 파리대학을 통하여 배출되었다. 

중세대학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 그러한 문제는 현대 대학사회에서 도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인 듯하다. 길드가 악용되어 교수의 성적 에 불만을 느낀 학생들의 집단적인 거친 행동 등의 부작용이 있었고, 미혼학생들의 기숙사는 도덕적 타락으로 성범죄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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