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란 말은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 (Scholae)에서 시작되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신앙의 진리를 논리 정연하게 체계화 하여 신앙을 잘 받아들이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신앙의 학문운동인 것이다. “신앙의 학문화”란 명제를 지닌 스콜라 철학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다음 세 가지의 중요한 입장을 나타내었다. 

1. 스콜라 초기 : 계시는 이성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는 철학은 세상의 지혜라고 생각하여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으로 변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짙었다. 어거스틴의 입장은 달랐다. 철학 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나 이성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이성 또는 이해는 신앙의 보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철학으로 진리를 찾을 수는 없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오셔서 친히 그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인간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믿도록 초청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계시된 복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을 말살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계시된 진리 안에서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와 보상을 주셨다고 어거스틴은 설명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안셈(Amselm)의 유명한 말 가운데서 핵심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는 경구가 있다.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안셈의 중심신학은 신(神)의 존재증명에서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신(神)의 존재증명은 계시이다. 그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자 하나님의 “스스로의 계시된”그 자체가 증명이다. 즉 계시에 의한 존재론적 증명을 시도하였다. (존 리스트, “히포의 어거스틴,” 『중세신학과 신학자들』, 에반스, “캔터베리의 안셀름,” 『중세신학과 신학자들』)

 2. 스콜라중기 : 신앙과 이성의 조화 

십자군 전쟁은 동·서 문물 교류의 동맹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13세기 동방에서 계승 발전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서방세계에 소개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는 아랍 철학자 아베로우스(Averroes)였다. 그의 주장은 인간이 이성으로 판단하여서 깨닫게 되는 완전한 지식 또는 진리는 계시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이성이 곧 진리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순수 이성의 증명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만이 완전하다는 그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위협적인 공격이 되고 있었다. 급변하는 시대사조에 발을 맞추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3세기는 중세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이 중심 무대이었다. 그는 신앙은 이성을 초월할 뿐 대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이성을 통해서도 진리의 많은 부분들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인간의 영혼불멸 등의 조항은 계시의 도움 없이도 이성의 작용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창조와 성육신, 삼위일체와 같은 진리 등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하는데 이것 때문에 고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조항 등은 신비한 신앙의 조항이기 때문에 계시에 의해서 믿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초자연적 덕성들은 오직 신앙과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주입되지만 사려 깊은 신중함(Prudence)이나 절제(Temperance)같은 덕성들은 자연 상태에서 도달할 수 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법이 절대 없으며 단지 완전하게 만들 뿐이다. 그의 신학이 어거스틴과 다른 점은 이성적 능력의 증진에 있다. 

3. 스콜라 후기 : 신앙과 이성의 조화의 붕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사상은 후세 사상가들에 의하여 많은 비판을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는 존 둔스 스코투스 (John Duns Scotus)와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am)이었다. 

스코투스는 주지적인 토미즘에 반대하였다. 그는 신앙과 종교를 분리하였다. 신앙의 의지가 이성적인 사색을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 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신앙의 의지로서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조항들을 더욱 강조하였다.
반면에 14세기의 철학자 윌리엄 오캄은 소위 유명론(有明論)을 주장하여서 이성을 통한 진리의 이해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그 어느 것도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인간의 자연 이성으로 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가 비록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지만 이는 어거스틴 주의로의 복귀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의 철학에 의하여 이제 스콜라철학의 체계 그 자체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이성을 등지고 실천적 경건의 생활을 통한 진리추구가 싹트게 되었다. 결국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은 중세 말기의 신비주의 신앙이 등장하는 길목 역할을 담당 하였다.  (알렉산더 브로우디,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 『중세신학과 신학자들』)

4. 스콜라 철학의 영향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도한 토미즘의 붕괴는 중세 교회의 권위를 하락시키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이성을 이용한 진리 추구의 시도 그 자체가 이성에 의하여 몰락당하고 말았다. 

토미즘의 붕괴는 르네상스 출현의 촉진제가 되었다. 비록 관점은 달랐지만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하여 중세 교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로마교 회가 오류 있다는 점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종교개혁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 시대 교황 중심의 가톨릭 교회를 지탱해 주기 위하여 스콜라 철학이 등장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추구 방법론에 의하여 교황이 지도하는 비성경적인 중세 교회는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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