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비주의 운동의 배경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도한 스콜라철학은 냉철한 이성의 논리 속에 신앙을 갇혀 놓고 말았다. 토미즘에 반대하였던 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하나님께 향한 불붙는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더 이상 차가운 이성의 통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교회의 형식적이며 말씀이 가려진 사제주의(司祭主義)는 영적인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이성의 통제와 형식적인 의식(儀式)의 강조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열망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들은 에크하르트(Meister Eckart)와 타울러(John Tauler) 등이다. 특별히 신우단(Friends of God)과 공동생활 형제단(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은 신비주의 운동의 대중화를 통하여 경건의 생활화와 학문 강조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하였다. 신비주의 운동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사제주의를 배격하며 하나님과의 연합과 직접적인 교제를 추구한다. 

② 극단적인 금욕과 절제운동 보다는 교육, 설교, 기도를 통하여 성도의 성숙함을 추구한다. 

③ 설교와 교육은 모국어를 중심으로 한다.

④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강조하지 않는다. 

2. 에크하르트(Meister Eckart)의 사상 

에크하르트(1260-1327)의 신비주의는 사색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파리대학의 박사 출신으로서 이성적인 방법론에 익숙하면서도 영혼을 파고드는 호소력 있는 신앙의 사색가이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범신론적 경향마저 띄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의 존재를 구별하였다. 그 반면 에크하르트는 두 존재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음식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 육화(肉化)되듯이 진리의 빛이 인간영혼 속에 들어오므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속에 들어가 연합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 요한2세는 1329년 3월 27일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서를 내리고 말았다. 

3. 타울러(John Tauler 1300-1361)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명 설교자인 타울러는 실제적이며 신앙의 감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령님의 능력 충만과 단순한 신앙을 주장하였다. “참된 지혜는 파리대학에서 배우기보다 주님의 고난에서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하나님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돋보이는 면은 실제적인 삶의 강조이다. 

자기 직업에 충실함이 신앙생활 못지않게 중요함을 외쳤다. 신앙의 생활화는 직업과 노동 그리고 이웃과의 인간관계속에서 나타나야 함을 주장하다고 가르쳤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직업과 노동의 신성함 또는 신적(神的) 소명의식은 그 뿌리가 타울러에게 있음을 엿볼 수 있다. 

4. 신우단(Friends of God) 

중세말기 교회생활에 영적인 고갈을 느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뭉쳐지기 시작하여 형성된 단체이다. 14세기경 독일의 라인강변 지역, 스위스의 바젤, 스트라스부르 지역까지 광대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생활하였던 신비주의 단체이다. 이 단체의 이름이 “신우단”이 된 것은 요한복음 16:15-16의 말씀(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에서 비롯되었다. 

신우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성경연구와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경건 생활과 더불어 성별생활이 강조되었다. 그들의 경건생활은 기성교회에 건강한 신앙의식을 강화시켜주었다. 현실교회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이단과 분파운동에는 결사반대하였다. 이들의 신앙운동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성경적 신앙의식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5. 공동생활 형제단(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 

에라스무스와 마틴 루터 등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의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한 단체이다. 14세기 말경 화란에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성경적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교육사업에 있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토마스 아 캠피스에 의하면 식당에서도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학문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여행길에까지 책 보따리를 갖고 다니므로 비난과 조롱을 살 정도였 다. 그들은 건강한 교회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형제단들이 있는 곳마다 교육기관을 세워서 성경적인 교회지도자와 훌륭한 사회의 지도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교육의 내용도 모국어를 사용하여 지식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특별히 복음적인 신학과 경건의 훈련은 종교개혁의 밭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역사에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란 말이 중세말기 신비주의 운동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다. 신비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범신론적 경향의 문제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은 중세 교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정화제 역할을 하였다. 

신비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로마교회의 그릇된 사제주의가 거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하여 성경적인 복음주의 복고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측변에서 중세말기 신비주의 운동은 종교개혁을 향한 준비적인 신앙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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