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 위클리프(John Wyclif)의 생애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기 이전 로마교회의 오류와 부패를 비판하면서 개혁의 기치를 든 인물이 있었다. “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존 위클리프이다. 그는 1330년경 영국의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당대 최고의 명문대학인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후 1360년 에는 이미 모교에서 교수사역을 시작하였다.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학문에 계속 정진하여서 1361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안수를 받았다.
그는 1372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대 학교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교황과 성직자들을 공격하였다. 지도자들의 권한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교권을 휘두른다면 그들은 이미 성직자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이라고 맹공격을 가하였다.
교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영국사회는 전국토의 삼분의 일을 교회가 소유하면서 면세혜택을 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왕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군사까지 동원하여서 그를 보호해 주었다. 교황은 일련의 교서를 통하여 그를 정죄하고자 했으나 1378년 람베드 재판에서 황태후의 지지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1378년 위클리프은 공직에서 물러나 학문 활동에만 전념 하였다. 주교들은 옥스포드에 압력을 가하여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반대하도록 노력했으나 거부되었다. 1381년 농민 폭동이 그를 어려움에 빠뜨렸다. 폭동의 지도자중의 한사람인 존 볼(John Ball)이 그의 제자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위클리프의 숙적인 윌리엄 코티네이(William Courtenay)가 대주교가 되자 1382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위클립의 진술 가운데 24개를 정죄하였다. 뇌일혈로 쓰러진 위클리프는 1384년 12월 30일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박해는 그가 죽은 후 더욱 강하여졌다. 1415년 콘스탄스 회의에서 260개 종목의 죄목으로 정죄하고 그의 모든 저서를 불태웠다. 1428년에는 교황의 명령 에 의하여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부관참사) 시킨 후 잿더미를 강물에 버리기까지 하였다. (제임스 헤론, 『청교도 역사』)
2.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의 주창자
중세 교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던 그의 사상의 기반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교리였다. 모든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사용을 허락하신 것뿐이다. 사용을 위임받은 자가 남용을 하였을 때에는 그 재산은 몰수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주권교리는 재산관리 뿐만 아니라 교회정치에도 적용되었다. 교황이나 교회회의들도 성경에 충실하지 않으면 모두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주교들 역시 행정적인 업무를 제외하면 일반사제들과 다른 점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일체의 세속적 권력을 가져서는 아니 되며 순수하게 신앙적인 책임만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교황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하여 세속적으로 빠져서 타락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교황이 아닌 이단의 우두머리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3. 위클리프의 교회론과 구원론 (스테펀 라헤이, “위클리프와 롤라드,” 『중세신학과 신학자들』)
(1)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입각한 예정론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2) 화체설을 거부함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에 동참하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므로 화체설은 거부 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였다.
(3) 공로구원을 가르치는 모든 교회의 의식 거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에 성자유물 숭배, 성지순례, 성자들을 위한 기도 등 모든 교회의 자질구레한 제도와 습관이나 의식 등은 구원을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게 된다고 보았다.
(4) 면죄부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거부
하나님은 돈을 받고 의를 판매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교회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죄를 짓게 되는 신앙의 심각한 오류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아쉬운 점은 연옥을 인정하는 오류가 있었다.
(5) 성경을 떠난 교황의 파문장
성경은 신앙과 삶, 그리고 교회정치까지 그 표준이 되므로 성경을 떠난 교황의 파문장은 전혀 무효하다고 하였다.
(6) 고해성사
신자는 주교나 신부 등에게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를 용서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라고 하였다.
(7) 예배
예배는 의식보다 신령과 진리로서 드려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4. 성경 번역과 보급
위클리프는 중세교회의 오류와 문제점들은 성경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개혁의 급선무는 대중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고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노년 생활의 대부분을 성경의 모국어 번역에 힘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기 위하여 전도대를 조직하였다. 그들을 가리켜서 롤라드(Lollards)라고 불렸다. 이들은 순회전 도자로서 어디든지 군중을 모아 놓고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은 때로는 세속권력자들이 교회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용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란과 폭동을 선도하는 자들에게도 이용당하였다. 재산에 관한 그의 교리는 봉건제도에서 농노들의 해방을 주장하게 되어서 농민반란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에 박해가 심해졌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저변의 다른 역작용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한 박해 속에서도 그의 가르침의 유산을 계승하며 끝내 종교개혁의 씨앗을 형성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