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총장 지낸 후 인생의 2막 열려
현재 한국 기독교선교유적을 보존하는 사역 진행
선교사들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보존하고 다음세대에 물려줄 것

대학교 총장으로 다음세대를 양성하는 일에 힘써왔던 서만철 장로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길목에서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를 만들어 한국 기독교선교유적을 보존하고 선교사들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기념하고 다음세대에게 전달하는 사역에 힘쓰고 있다. 서 장로는 이 일을 어떻게 시작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어떻게 함께하셨을까?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 서만철 장로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 서만철 장로

| 삶의 시선

미국 유학생활 중 만난 하나님
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한국 기독교선교유적을 보존하는 일을 시작

백제문화유적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까지의 15년

Q. 삶의 굴곡 중에 가장 행복했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떤 순간이었는가?

행복했을 때는 첫 아이를 낳았을 때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학생활 중 돈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다. 당시 병원비가 2100$이었는데, 36년전 그 때는 매우 큰 돈이어서 병원비를 매월 60$씩 내기로 약정을 했다. 그 때 내가 받는 장학금이 월 140$이었는데 병원비를 내고 나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신기했고 아버지로써의 책임감과 함께 행복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힘들었을 때는 지난 5~6년 전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해야 되는 시점이었는데 많이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성경 말씀과 한국선교유적 보존활동을 하면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힘들었던 시간 중 나에게 큰 감사거리가 되었다.

Q. 하나님의 첫사랑을 경험한 순간은?

나는 하나님과 드라마틱하게 만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서서히 말씀에 젖어서 만난 케이스다. 하나님을 처음 믿기 시작한 것은 1984년 8월, 미국에 도착한 처음으로 맞이한 주일에 한인교회를 주변에 물어서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년 후 침례를 받고 지금까지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최근에는 선교유적 관련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끌어 가심을 종종 느끼고 있다. 필요한 때에 적합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는데, 우연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한다. 추수가 끝난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연명하던 이방여인인 과부 룻이 밭주인 보아스를 우연히 만나서 예수님의 증조할머니가 된 사건은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명하신 뜻에 따라 그야말로 동방의 끝인 한국땅에 복음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선교사들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심을 느끼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서만철 장로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서만철 장로

Q. 당신의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은 일은 무엇인가요?

공주대학교 총장을 마치고 충남교육감 선거에 도전했는데 아쉽게 석패했다. 그 후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가졌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말씀을 읽고 다른 분들의 간증을 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 중에 어느날 새벽예배 중, '하나님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할까요?'라고 물어보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가 그동안 해오던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내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응답을 주셨다. 그래서 남은 기도시간 동안 내가 잘해오던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는데 그 때 떠오른 생각이 교수로 재직할 당시 백제문화유적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만드는데 15년 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백제에 대해 전공한 학자들을 모아서 가치적인 것들을 강조하면서 백제 유산에 대한 독려도 많이하고 신문에도 글을 많이 쓰고 관련된 학술을 주관하면서 언론으로 많이 접하게 했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백제문화유적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그 부분이 내 커리어 중에 상당히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기도하는 내내 떠올랐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3000명이나 넘게 찾아왔었는데 그분들이 남겨놓은 유적이 곳곳에 방치되고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들을 지방자치단체, 정부와 협력해서 문화재로 등록하고 보존해서 신앙회복의 그루터기로 삼고 다음세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보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런 사업을 하는 법인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화재청에 사단법인을 신청하고 그 이후로부터 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이 일에 몰두하고 있으며 인생 마지막 과제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셨던 일 중 대표적인 일 같다.

백제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데 큰 기여를 한 서만철 장로에게 수여된 공로패
백제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데 큰 기여를 한 서만철 장로에게 수여된 공로패

Q.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의 변화는?

유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가까운 친구의 첫 평가가 '사람이 많이 변해서 왔네'였다. 그 때 나는 '교회에 다녀서 그런가 봐'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일에 옳고 그른 것을 많이 따지는 성격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끝까지 토론해서 이겨야 하는 성격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모든 일을 기도하면서 내가 최선을 다하되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는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Q. 최근 삶에 변화를 이끈 것이 있나? 있다면 무엇인가?

최근 삶이 많이 변화되었다. 교수로 30년을 지냈는데 그 생활을 마감하고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130년전부터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자기 일생을 바치고 자기 자녀들 생명도 바치고 때로는 순교, 순직하신 분들이 남겨놓은 유산들을 발굴해 보존하고 문화재로 등록도 시켜 더 나아가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지방자치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지내고 있다.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온 변화라고 생각한다.

| 사역의 시선

문화재청에 등록된 한국선교유적연구회로 사역 중
한국의 기독교선교유적을 세계유산으로 추진
다음세대에 신앙유산을 물려주고 파

Q. 지금 맡고있는 사역을 소개한다면? 

한국선교 100주년인 1984년까지 3,000명에 달하는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일제강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광복까지 1500명의 선교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학교, 병원, 교회 및 선교관을 세워 교육과 의료 및 전도활동의 결과 현재 우리는 5,000년 역사 아래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선교활동을 위해 세웠던 학교, 병원, 교회 및 선교관 등의 시설들은 거의 다 헐려 없어진지 오래이며 그 중 소수만 남았다. 지금도 소중한 기독교선교유적들이 도처에서 소멸되어 가고 있다.

공주꿈의교회에 세워진 말콤 펜윅 선교사 동상
공주꿈의교회에 세워진 말콤 펜윅 선교사 동상

선교유적들은 단순히 건물 한 두채가 아니라 기독교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문명이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계기로 미국과 캐나다로 전파되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도, 중국, 일본과 함께 한국에 전파된 거대한 세계문명 교류의 중심축에 있는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선교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적 가치를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는 문화재청에 등록된 공인단체로서 선교 유적에 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과학적 보전 운동 및 순례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하여 숭고한 선교정신을 후손에 물려주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Q. 한국선교유적연구회의 주된 사역은 무엇인가?

기념관, 동상, 문화사역 등 지역별 선교사 기념사업과 선교유적지 순례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선교유적지 보존활동, 선교유적의 가치 재조명을 위한 선교유적 학술회의, 한국의 기독교선교유적 세계유산 추진, 국내외 지회를 운영하고 있다.

Q. 최근 충남기독교총연합회와  MOU를 체결하고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관련 MOU도  체결하셨다. 어떤 사역을 위해 MOU를 체결하셨나?

충남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선교유적연구회는 업무제휴를 통하여 충남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기독교 복음전파의 역사적 가치, 선교유적의 보전과 활용 및 세계문화 유산적 가치 연구에 있어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MOU는 의정부 CBMC, 공주 CBMC, 영명학원이사회,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CBMC 충남연합회가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선교사의 후손을 찾고 충청지역 선교와 교육 정부 수립에 기여한 부자에게 훈장 수여 추진, 선교사 묘역 정비를 위한 1단계 추진사업을 내용에 담았다.

지난 9월 공주영명중고등학교 대회의실에서 열린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MOU체결
지난 9월 공주영명중고등학교 대회의실에서 열린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MOU체결

Q. 사역 가운데 감동,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첫번째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이다. 이 일을 위해서 앨리스샤프 선교사님이 미국에서 영면하고 있는 곳이 어딘가 찾아보고 있었는데 서울의 한 교회에서 버스를 타고 공주선교유적지를 순례하러 왔었다. 그 분들을 대상으로 1시간 강의를 했는데 한 여성분이 손을 들더니 자기 어머니가 사애리시 선교사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분의 어머니와 약속을 잡고 인터뷰를 하러 LA에 갔다. 99세가 되신 어머니를 만나뵙고 사애리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분의 묘가 어딨는지 몰라 미국 행정부서를 다 뒤져서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뷰하신 어머님이 사시던 곳과 2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그렇게 찾게된 묘를 남편의 묘가 공주에 있으니 그 옆에 아내의 묘를 세우자 해서 이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인터뷰 하셨던 그 어머니는 사애리시 선교사의 기억을 많이 남겨주시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유관순, 샤프 선교사, 사애리시 선교사 동상 앞에서 설명  중인 서만철 장로
유관순, 샤프 선교사, 사애리시 선교사 동상 앞에서 설명 중인 서만철 장로

하지만 그 이후 일을 순탄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어떤 사람을 통해서 LA의 한 교회 장로님을 만나게 됐고 이 사업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그 장로님께서 어느 한 교회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셨다. 그런데 알고보니 사애리시 선교사의 묘지가 그 교회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애리시 선교사가 활동하던 선교유적 옆에 있는 공주고등학교를 다닐때 아름다운 그 선교사 집을 스케치하는 미술활동도 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오면서 LA 지역에 추진 위원회를 만들고 사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선교사의 묘지 이장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사애리시 선교사는 국적이 캐나다고 후손이 없기 때문에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LA지회에서 우리는 사애리시 선교사를 기념하고 그 사역과 정신을 잊지 않고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동상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줘서 그 사업이 동상을 세우는 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유관순을 처음 데려왔을 때의 모습으로 사애리시 선교사, 그 남편인 샤프 선교사, 유관순 총 3명을 동상으로 세우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상 작가를 선정하는 일에 있어서 한 분을 추천받았는데 명성교회 장로님이셨다. 그분의 장인어른이 선교사들이 세웠던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셨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감동 속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공주영명중고등학교에 세워신 유관순, 샤프 선교사, 사애리시 선교사 동상
공주영명중고등학교에 세워신 유관순, 샤프 선교사, 사애리시 선교사 동상

두번째로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무실을 구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사무실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시던 분들이 있던 집이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집이 비는 상황이 되었었는데 그 분들이 이 집에 들어올 분들은 동상 세우는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전해들었다. 그 분들이 기도하던 중 동상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환상을 보여주셨다고도 했다. 그 이후 지금의 사무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무실 앞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사무실 앞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앞의 두가지 내용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분이 '그것이 이 사업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것이 정말 그랬기에 이 세가지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Q. 당신의 달란트를 소개한다면?

적재적소에 필요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연결하여 일을 해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 부분을 잘한다고 남들이 말한다. 그래서 이것이 내 달란트인 것 같다.

어떤 때는 후배 교수들로부터 앞에서 일은 많이 잘 벌리는데 뒷 마무리를 잘 안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럴때면 모든 걸 내가 다 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왜 필요한가라고 응수하면서 한바탕 웃기도 한다. 합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 달란트가 있는 것 같다.

Q. 내 모습의 어떤 것을 더 계발하고 어떤 것을 더 축소하고 싶은지? 

이제 인생의 정리단계인데 새롭게 계발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성경말씀이 있듯이 푯대를 향하여 가는 길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더 연합시켜서 합하여 선을 이루는 쪽으로 노력하고자 한다.

지난 9월 진행된 충남기독교총연합회와의  MOU체결
지난 9월 진행된 충남기독교총연합회와의 MOU체결

| 생각의 시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 되길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나를 쓰실 하나님을 기대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Q. 잠들기전,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국가가 많이 어려운데 특히 기독교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법들을 만들고 국가가 반기독교사회로 내닫는 것 같아 큰 걱정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치고 잘 된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도 130여 년 전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로 그들이 세운 근대학교, 병원, 교회의 영향으로 자유민주국가가 수립되었다. 그 결과로 5,000년 역사 이래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세계 상위 5% 국가가 되었는데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징조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Q.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토인비의 '문명이 꽃피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위협이 필요하다'이다. 이 말은 인류 문명사를 평생 연구한 역사학자의 결론인데, 모든 조건이 풍족한 곳에서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조건이 좋은 것이 아닌 적당한 자연재해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문명이 번성했다는 결론이다. 자연 뿐만 아니라 한 국가에 있어서도 한 회사에 있어서도 또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을 때 발전하는 원리이다. 현재 나에게 부족한 것은 미래에 나의 성공의 원천이다.

서만철 장로가 한국선교유적연구회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서만철 장로가 한국선교유적연구회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Q. 어떠한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때 가장 기준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인 것 같고 적어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은 늘 하면서 판단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일인가 즉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하게 된다. 때로는 먼 훗날의 큰 그림을 얘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아해하기도 하고 한다. 그리고 그다지 믿지는 않지만 그게 될까 하는 심정으로 동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 자신도 100% 확신을 갖고 추진하지는 않지만, 매일 성경을 보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지금 하는 일이 홍해갈라지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인가 라는 비교질문을 자주 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면 또 그분의 뜻에 맞기만 하다면 심부름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지랖 넓게 뛰어다니고 있다.

Q. 나의 고정관념을 깼던 사건이나 문구는?

교회 목사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인데 고린도전서 2:9 말씀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상상 그 이상인데 성경말씀에도 그랬듯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독교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 100년도 안된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세계 유산이 되겠느냐 라는 생각들도 있는데 이것은 한국 땅에 서양문화가 들어온 창구이고 선진 문물과 교류의 창구이다. 허물어져가는 외국인선교사가 살던 집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서 고정관념을 깼으면 좋겠다. 그런 일 중에 하나가 이 일이 아닌가 싶다. 위 말씀과 같은 방법으로 응답한다 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추진하고 있다.

Q. 독자에게 권면과 도전의 한마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기도하면서 계획을 하되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성급히 판단하지 말고 발걸음을 인도하시는대로 꾸준하게 추진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해나갔으면 좋겠다.

인터뷰 중인 서만철 장로
인터뷰 중인 서만철 장로

| 세상의 시선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운 세상이 되길
내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보여지는 삶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세상이 되었으면

Q.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달이 차면 기운다는 속담이 있듯이 세상 역사를 보면 흥했다가 망하고 성했다가 쇠하고 흥망성쇠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우상숭배하여 도탄에 빠지고 또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는 반복되는 역사가 성경에서도 나와있다.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 없이 편하고 어려운 것이 없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Q. 변화했으면 하는 세상의 방향은?

나는 어릴 때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언덕 위에 있는 교회당 그림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아이들 손잡고 교회에 다니는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런 즐거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만철 장로가 소개하고 있는 충남 유적들
서만철 장로가 소개하고 있는 충남 유적들

Q.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때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조용하게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여졌음 좋겠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동상을 세우면서 뒤에 석판이 있는데 후원자 약 450명의 이름을 다 새겼다. 마지막에 동상을 세운 이를 쓰는데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서만철을 쓰자고 했는데 기획하고 전체적인 일을 맡아서 했지만 숭고한 사역을 기억하는 동상에 내 이름을 쓰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단체 이름만 썼는데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보여졌음 좋겠다.

Q. 한 가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꿀 것인가?

빈부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 높은 곳을 깎아서 낮은 곳을 메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가장 큰 불만 요인은 양극화, 특히 경제적 부의 양극화 현상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물론 같이 벌어서 다 같이 나누자는 공산주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미 실패한 사상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도 공산주의 보다는 상대적으로 좋다고 하나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경우 빈부격차의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는 것처럼 지혜로운 제도로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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