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10월 31일 주일은 종교개혁 504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 세계 기독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린다. 2006년 독일은 통독 후의 경제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아 국민의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거시 경제지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실물경제 물가는 폭등하고 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고민 끝에 묘안을 냈다.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서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누구인가?”
1위에 오른 인물은 괴테도, 베토벤도, 헤겔도, 히틀러도 아니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루터는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광업을 하는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느 아버지가 다 그렇지만, 루터의 아버지 또한 대단한 교육열을 가졌다. 한스 루터는 아들 루터가 법률가로서 대성하기를 원했다. 루터의 나이 22세가 되던 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슈토테른하임’을 지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했다.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고, 돌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심한 벼락이 쳤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루터는 땅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 공포에 떨며 서원기도를 했다.
“성 안나(Saint Anne)여, 나를 도우소서, 살려만 주신다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루터가 당한 벼락 체험의 핵심은 ‘두려움’이다. 뇌성번개 아래에서 루터는 두려워 떨었다. 죽음 그 자체가 무서워 떤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이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루터는 1505년 7윌 17일 ‘에르푸르트’ 어거스틴파 은둔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511년 가을, 루터는 지금은 루터 기념관(박물관) 화장실로 사용되는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탑 속 서재에서 신약성서와 시편 연구에 몰두했다. 루터는 시편 22편을 읽던 중, 이 시편 말씀이 자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
루터는 하나님께서 금식이나 고행(苦行)같은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또한 로마서를 연구하던 루터는 <로마서 1: 17>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구원 진리의 빛에 직면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적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스콜라신학 -> 독일 신비주의 -> 복음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루터의 ‘탑의 체험’이다. 어거스틴은 32살 때 무화과나무 아래서 로마서 13: 12를 읽음으로써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만났다. 루터는 31살 때 비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에서 시편 22편과 로마서 1: 17을 읽음으로써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생생하게 만났다. 이로써 루터는 중세교회가 상실한 복음을 재발견하여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되게 하는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다.
루터를 불러 복음을 재발견하게 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 한다.
글ㅣ이규철 목사(안동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