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창38:14, 개역개정)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앉았다. 그것은 막내 아들 셀라가 이미 다 컸는데도, 유다가 자기와 셀라를 짝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38:14, 새번역)
유다가 부인과 사별한 후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갔을 때 다말은 얼굴을 가리고 그가 지나는 길목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유다가 당연한 듯 매춘을 시도한 것을 보면 다말이 여기까지 예상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말은 매춘의 대가를 원했고 유다가 나중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 주기로 약속하자 그에 대한 담보물을 재차 요구합니다. 마침내 유다가 도장과 허리끈, 지팡이를 내주고 다말과 동침했고, 다말은 유다의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단 한 번의 동침으로 아이가 생기리라는 것까지 예측하지는 못했겠죠. 덕분에 그간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가 그녀에게 있지 않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창38:25, 개역개정)
그는 끌려 나오면서,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냈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다말은 또 말을 계속하였다. “잘 살펴보십시오. 이 도장과 이 허리끈과 이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창38:25, 새번역)
시간이 흘러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다가 간통을 이유로 다말을 죽이려 하자 다말은 유다에게 받은 담보물을 공개했죠. 유다는 셀라와 결혼시키지 않은 자신의 결정 때문에 다말이 벌인 사건임을 알게 되었지만 수습하기에는 늦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셀라와 결혼시킬 수도 없었고 며느리가 돼야 했을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는 더더욱 없었죠. 결국,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다말이 낳은 아이를 데려와 자기 아이로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말은 세라와 베레스 쌍둥이를 낳았고 세라의 손이 세상에 먼저 나왔지만, 그 손이 도로 들어갔을 때 베레스가 태어남으로써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던 야곱의 일이 재현되었죠. 동생이었던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직계 후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요(마1:3).
둘째인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유다의 직계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게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이 결국 장자가 되어 이삭을 계승한 일과 동일하죠. 하나님은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될 유다의 후손이 다말을 통해 태어날 것을 이미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유다가 당시의 법도 그대로 다말과 셀라를 결혼시켰다면 어땠을까요? 다말이 셀라의 아들을 낳음으로써 고 하나님 계획이 동일하게 실현되었을 겁니다.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죽을까 두려워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유다의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았죠.

독자가 보기에 37장과 39장의 요셉 이야기 사이에 끼어있는 38장 유다 이야기가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유다라는 인물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이 성경에 실린 이유도 궁금하고요. 38장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으려면 1절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기 시작한 일이 모든 사건의 출발점입니다. 야곱까지만 해도 집안의 전통을 지키며 살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며 지역 사회와 분리된 폐쇄적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는 상황에서는 부모에게 보고 배운 그대로, 집안에 내려오는 전승에 대해 들은 대로 사는 것을 누구도 막거나 헐뜯지 않죠. 다만 이런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안사람들끼리의 결혼이 필수였고, 같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먼 곳에 살았던 밧단아람 식구들이라면 최적의 배우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반과 갈라서면서 혼인 관계가 끊기자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결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 문화에 대한 동화도 차츰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집안 전통을 지켜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계속되는 이민족과의 결혼 속에서 가족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38장은 훗날 애굽으로,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될 이스라엘 민족이 전승되는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만 선민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해야 합니다.
유다가 버리려 하고 다말이 지키려 했던 것은 결혼 풍습이었지만 창세기가 이것만을 말하고자 38장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장차 수많은 민족에 둘러싸여 살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겠는가에 관해 묻고 있죠. 38장은 39장 이후에 나오는 요셉의 활약으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유다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만 다말 덕택에 후손을 더 볼 수 있었고 그녀가 낳은 후손 계보는 유대인 역사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죠. 끝까지 기억하고 지켜내려 애쓰지 않는다면 신앙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 사라지고 말 겁니다. 수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아직도 교회와 신앙 전통이 유지되는 것은 그것을 지키고 전수한 수많은 이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