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하고 싶고 그만큼 사랑받고 싶은 욕망, 본능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요. 누군가에게 받아 본 조건 없는 환대와 친절, 사랑의 경험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일수록 내면이 병들고 고장 나버려 성인이 되어서도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사랑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하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은 성경의 가장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그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 대속의 사건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지, 사랑의 깊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은 독생자 예수를 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인생 중 경험할 수도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자녀의 죽음’일 것입니다. 자녀를 길러본 경험이 있는 부모님들은 누구나 인정하실 텐데요. 차라리 내가 아프고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지 내 아이의 아픔과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상상하기도 꺼려지는 일일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인 아들의 죽음이 실은 인류가 처해 있는,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감당하신 극렬한 고통과 아픔을 통해 저와 여러분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무게까지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 자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대가 지급을 전제하기에 사랑은 숭고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동일한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셨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음을 얻기를 원한다.”라고 간곡히 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한 것이 아니라 굳이 손을 그에게 대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손을 얹는다는 것은 그 병이, 그의 부정함, 불결함이 나에게 옮겨 온다고 할지라도, 혹여나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람이 나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우리가 도전해야 할 사랑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어 상대의 삶의 무게를 내가 대신 짊어지더라도 그이가 버거워하던 인생의 무게가 좀 덜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는 것. 십자가 사건 이후에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의 시도와 도전이 절대 헛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저는 오늘도 장병들을 진심으로 끌어안고 그들의 삶과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수고를 알아주는 이도 없고 수고에 관한 결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장병들을 향한 사랑의 도전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다시 한번,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랑의 도전을 꿈꾸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응원합니다.
글 │ 김수영 목사(성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