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악마가 늙은 악마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었어요?” 늙은 악마는 “그들에게 공포를 주입시켰지”라고 대답한다. 어린 악마가 계속 말한다. “정말 잘했네요!” “그럼 사람들이 무엇에 두려워했나요? 전쟁? 굶주림?” 늙은 악마가 말하기를 “아니야, 사람들은 질병을 두려워했단다.” 어린 악마가 묻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아프지 않았나요? 그들은 죽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때로 고침받지 않았나요?” 늙은 악마가 말하기를 “물론 사람들은 아팠고, 죽었고, 일부는 회복되어 살아나기도 했지.” 어린 악마가 놀라면서 대답한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어요???” 늙은 악마가 또 답한다 “너도 알다시피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치루고라도 꼭 지키려고 하는 게 자신들의 생명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안아주는 것, 인사하는 것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멀리했지,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 접촉을 멀리했지, 인간들이 해오던 것을 차례로 포기했단다. 후에 사람들은 돈이 떨어졌고, 직업도 잃고,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잃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었지, 빵이 떨어짐에도 직업을 그만 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신문에서 읽고 들은 것을 믿었거든. 사람들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어. 사람들은 자기 집을 떠나지 않았고 정확하게 어느 곳도 안갔단다.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집을 방문하는 것도 멈추었단다. 누가 자신들을 묶어두지도 않았음에도 세상은 커다란 수용소로 변했고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단지 참혹한 하루를 더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사람들이 매일 매일 죽었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데려오기 쉬웠던 거지.>

위의 글은 1942년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가운데 나온 구절로 알려져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루이스의 통찰은 마치 우리 시대의 자아상 같습니다. 대자산이라고 불리는 뒷산을 일주일에 닷새 정도는 걷습니다. 대자산 능선길에는 멀리 북한산 오봉도 눈에 들어옵니다. 코스를 잡기에 따라서 4천보에서 6천보 정도를 한 시간 내외로 걷습니다. KBS 클래식 음악전문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휴대폰에서 손바닥 크기의 BOSE 스피커로 듣든지, 아니면 듣고 싶은 성경을 우리말로든 영어로든 들으면, 걷는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도시 문명의 흔적보다 4계절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날마다 변하는 푸른 하늘의 모습도 보면서 귀로는 좋은 음악을 듣는 기쁨이 쏠쏠합니다. 게다가 포장되지 않은 산길이어서 걷는 감촉이 정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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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주 가끔씩 산길을 걷는 다른 분들도 만납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준비해서 목에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어느 날은 세 분의 아주머니들을 만나서 스쳐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산길이라 그랬는지 아예 마스크를 하지도 않고 유유히 지나가는데, 그 다음 분은 계속해서 마스크를 하고 계셨고, 세 번째 분은 나처럼 일행을 보고나서 마스크를 한다고 바빴습니다. 상대방이 하고 걷든지, 우리를 보고 마스크를 하면 우리도 이에 대응하고, 아예 마스크를 하지 않고 오면, 나도 목에 걸친 마스크를 급히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찍 하무라비 법전의 구절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처신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레 13:45), 모세 시대의 문둥병자가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올 것 같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늙은 악마가 주입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 주변의 자연뿐 아니라 푸른 하늘도 흰구름도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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