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2.(월) 룻기 1장 15-22절 묵상과 적용^^ “회복의 빛을 비추소서”

샬롬!^^ 주일은 잘 보내셨나요? 제주도의 날씨는 맑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우리 교회는 오랜만에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날씨도 좋았고, 걸으면서 교제도 좋았습니다. 자연을 묵상하며, 좋은 사람들과 길을 걸으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아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기만을 구하며 또 하루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매일의 삶을 낭비하지 않게 붙들어 주소서!

올레길 10코스 산방산
올레길 10코스 산방산

룻기 묵상을 시작하였습니다. 룻기는 은혜의 책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러하지만 특히 룻기를 읽을 때마다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합니다. 룻기는 사사 시대의 한 가정과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서의 왕정시대로 넘어가기 전 사사 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경첩'과 같은 책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잠언서 다음에 나와서 잠언서의 마지막 31장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라는 질문 다음에, 룻기를 통해 '현숙한(지혜) 여인'인 룻기를 소개합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를 중심으로 하여 모압 여인 룻과 여리고 성 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나옵니다. 모압 여인 룻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아들 보아스의 ‘헤세드’(은혜, 사랑, 자비, 긍휼)를 통해서 '텅 빈'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헤세드가 임합니다. 룻기의 마지막 4장은 텅 비어 돌아왔던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 ‘오벳’(나오미의 아들)을 안고 풍족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그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은 만족합니다. 항상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삽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텅 빈 것 같은 순간’이 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며 ‘후일’을 웃습니다.

올레길 12코스 당산봉 위 생이기정바당길에서 내려다 본 차귀도
올레길 12코스 당산봉 위 생이기정바당길에서 내려다 본 차귀도

15-18절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오늘 본 15-18절은 나오미의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오르바는 그의 백성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즉 모압 백성, 모압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에게 온 기회를 차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이야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그 순간은 오르바의 선택이 더 지혜로운 선택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 룻은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6-17절).

이에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더 이상 룻에게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않았습니다(18절).

오르바의 선택과 대조되는 “룻의 선택과 결심”을 묵상합니다. 늙은 나오미에게 어떤 인간적인 희망이나 미래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젊은 룻에게 짐이 될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룻은 나오미를 붙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나오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10년 가까이 살면서 받았던 나오미의 사랑과 나오미의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당장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나오미의 백성과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나오미를 선택하는 것은 나오미의 백성과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국민, 공동체)을 바꾸는 일이었으며, 섬기는 신을 바꾸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심'으로 나오미를 붙들었습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누구를 선택하고 따르느냐? 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누구를 내가 따를 멘토로 삼고, 누구를 롤-모델로 삼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인생과 운명, 영원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믿음이 자라고 변화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을 만나면 믿음이 사라지고 변질되며 멸망의 썩을 열매를 맺습니다. 룻은,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믿음의 사람인 나오미를 선택하였고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제 룻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따르고 있는 신앙의 멘토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청년 때 읽었던 책에서 조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 전도사 때 만났던 윤종하, 성경 속의 인물인 다윗과 바울을 떠올리며, 특별히 바울을 떠올리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목회를 할수록 바울 사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왜 그럴까?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인데...! 아마 예수님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그이기에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의 고난, 그의 삶, 그의 말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을 적십니다.

올레길 10코스 송악산 둘레길
올레길 10코스 송악산 둘레길

19--22절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19-22절은 이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이 나오미의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모습을 기록합니다.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그들 둘은 마침내 베들레헴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온 성읍이 나오미로 말미암아 떠들며 말합니다.

“이가 나오미냐?(Is this Naomi?)”(19절).

이는 나오미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 말을 듣고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텅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께서 나를 괴롭혔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21절).

이 말씀은 아무리 읽어도 나오미의 불평이나 불신의 표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나오미의 ‘쓴 신앙고백’으로 읽힙니다. 자신을 ‘나오미’(희락)가 아닌 ‘마라’(쓴)라 부르라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손길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언약적 징벌로 ‘풍족하게’(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나갔지만, ‘텅 비어’(모압 며느리와 자신만 남은 상태) 돌아온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할 때, 그리고 언약에 비추어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 회복의 소망의 빛이 비취는 줄 믿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올 때는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였습니다(22절). 이는 회복의 소망의 빛입니다. 오늘, 나오미처럼 '쓴'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회복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어승생악 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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