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아 어거스틴 신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안동성결교회 이규철 목사와 특별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규철 목사는 경안대학원대학교에서 강의하며, 한국군선교신학회 실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어거스틴의 신학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스승' 이라고 말하는 이규철 목사를 코로나19 비대면 상황을 고려해 두번의 서면 인터뷰로 만난다.

어거스틴 신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안동성결교회 이규철 목사 (출처:크리스찬투데이)
어거스틴 신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안동성결교회 이규철 목사 (출처:크리스찬투데이)

Q.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소개해 달라 

목회하고 있는 안동성결교회는 13년 전 청빙을 받아 육군 군종목사(예비역 소령)로서 예편한 후 지금까지 13년간 목회하고 있는 목회사역지다. 이곳 안동은 한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정신적 철학적 사유의 뿌리에 해당되는 인구 16만의 소도시이다. 나는 안동의 기저에 흐르는 깊은 정신적 철학적 문화적 기풍을 존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화를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신앙적 신학적 감화력이 우리 안동을 사랑해 주시고 강력하게 리더하기를 깊이 간구하고 있다.  나는 목회자로서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나부터 성결, 우리부터 평화’하기를 도모한다. ‘열렬한 기도’(Ardent Prayer)와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로써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목회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초대 예루살렘, 안디옥, 빌립보,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성령과 함께하는 좋은 교회 좋은 성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회 비전이다. 바라기는 코로나19로 시들어버린 이 땅 사람들 영혼 속에 예수 십자가 부활의 사랑의 복음을 불꽃같이 증거 되기를 갈망한다.

ㅣ세계사에 흐름 영향 준 가장 유명한 독일인, 마르틴 루터
ㅣ성경 가치 재인식, 양심의 신앙적 가치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ㅣ프로테스트탄트 기독교 문화형성에 큰 영향 줘

Q. 이번 주간은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는 주간이다. 신학자로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현대는 ‘그리스도교 후(後)시대’(Post Christian Era)라고 일컬어지며 세속이 지배하는 시대이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사상의 영향력은 여전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오래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06년 독일은 통독 후의 경제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아 국민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거시 경제지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실물경제 물가는 폭등하고 살기가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고민 끝에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서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누구인가?” 1위에 오른 인물은 괴테도, 베토벤도, 헤겔도, 히틀러도 아니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고 평가받는 루터의 존재 의미는 비단 독일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기독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세계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 ~1546)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 ~1546)

첫째, 루터는 성경의 가치를 재인식한 공이 크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자기가 교황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릇된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터 이전의 개혁의 선구자들에게는 없던 일입니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의 진부(眞否)를 측정하는 규준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바로 중세의 어둠 속에 버려졌던 성서를 찾았다는 것이 그의 불후의 공적이며 오늘날까지 루터의 독보적인 입지의 연유라고 생각한다.

둘째, 루터는 중세 사람들이 망각한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한 업적이 크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직면했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이것이 루터 신학 사상의 기초이다. 그가 면죄부(속죄권) 판매에 반대한 것은 구원이란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인격적 관계에서 되는 것이지 교회 정책에 대한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째, 루터는 인류에게 양심의 신앙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뉴턴은 “사과는 왜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가”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었기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루터는 수도사 시절 “수도원의 이 모든 규정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를 의심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양심의 깊이를 건드리고 끝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평화를 얻었다. 그렇기에 루터의 양심은 면죄부 판매를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루터 연구가들은 루터의 신앙을 ‘양심종교’라고 부른다. 실로 루터는 양심의 사람이었다. 루터가 유럽 온 천하를 지배하고 모든 민초들의 생명까지 관할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부정을 내리고 그릇된 가르침에 저항하고 도전한 것은 루터가 양심의 등불을 밝힌 자가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의 진리 안에서 거듭난 양심의 사람 루터의 신앙적 투철한 헌신은 세속화되어 순진성을 상실한 채 세정(世情)에 물든 현대 그리스도인의 화석화된 무뎌진 양심을 두드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넷째,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인류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루터의 개혁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세 교권의 사슬과 미신의 울타리와 무지와 속임의 허구에서 해방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의 인간 됨은 자유를 찾는데 있다.

다섯째, 루터의 ‘소명론’은 그를 근대의 선구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했다.중세의 교회는 성속의 차별을 강조하고 영적인 것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우위를 강조했다. 이에 반해 루터는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역설한다. 루터는 세속 직업을 성직과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응답하는 일로 여겼는데, 가히 근대를 열어 젖힌 선구자다운 기독교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루터의 깊은 신앙과 뜨거운 복음적 신학 사상은 그의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후대 인류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를 발판으로 하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간 존중 정신, 여성 인권 존중, 보편적 교육 시행 등등 루터가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ㅣ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종교개혁 신학적 기반 마련
ㅣ어거스틴 신학 사상 바탕으로 중세 스콜라 신학 혁파
ㅣ루터의 구원론의 출발점도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시작해

Q.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에게 특별하고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1505년 7윌 17일 법학도의 길을 걷던 22세의 루터가 ‘에르푸르트’ 어거스틴파 은둔수도원의 수도사로 헌신하고자 할 당시 중세 사회는 흑사병 범람의 후유증으로 대중적 공포와 집단 불안을 겪고 있었다. 교계 또한 무지와 미신에 사로잡혀 성자숭배 사상이 만연했다. 중세 사람들은 존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성자들을 통하여 기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행위적 공로주의에 젖어있었다. 1510년 10월 루터는 로마로 성지순례를 갔는데 평안을 얻지 못했다. 교회의 사치와 권력에 빠진 모습을 목격하면서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라테란 성당의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고행의 순례를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루터는 고행이나 순례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고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행위에 앞서 ‘믿음’이라고 의식하기 시작했다.

1511년 가을, 루터는 지금은 루터 기념관(박물관) 화장실로 사용되는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탑 속 서재에서 신약성서와 시편 연구에 몰두했다. 루터는 시편 22편을 읽던 중,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 1)라는 말씀이 자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로마서를 연구하던 루터는 로마서 1: 17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구원 진리의 빛에 직면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 17)

루터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적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바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복음의 사랑과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스콜라신학↠독일 신비주의↠복음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루터의 ‘탑의 체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자 루터의 집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루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네이버블로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자 루터의 집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루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네이버블로그)

Q.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거스틴 신학의 재발견'이라고도 한다는데,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어떤 점을 평가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경안논단」 제 7집(2014년)에 “종교개혁의 스승으로서의 어거스틴”이라는 나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먼저 ‘오버만’(Heiko A. Oberman)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루터는 “어거스틴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논박한 자”입니다. 루터는 1509∼1510년도 겨울 학기를 계획하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과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을 주석했습니다. 이 주석 작업을 한 루터는 “나는 우리의 학자들이 그토록 뻔뻔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가톨릭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라”라는 당혹감을 표출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지렛대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중세 스콜라신학의 거대한 체계를 들어 올려 혁파해 나갔다고 본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제기할 때 95개조 여러 조항 역시 어거스틴의 신학에 우호적으로 의존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어거스틴주의적이며 바울주의적인 성격이 뚜렷하다. 루터는 인간이 무능력하기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어거스틴의 ‘단독사역론’(monergism, 단동설, 單動設)을 따랐습니다. 루터는 어거스틴-바울-성서의 입장을 따라 인간을 죄인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루터는 인간이 범하는 죄를 단순히 영혼(혹은 정신)의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의 모든 능력이 상실되었다고 본다. 이는 다분히 어거스틴의 인간 이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루터의 구원론의 출발점 역시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특히 루터는 1531년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두 왕국’(the Two Kingdom)사상을 펼치는데, 이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큰 영감을 얻은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세상나라(불신자의 세계)는 ‘세상적 통치’(weltliches Regiment)인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인 통치’(geistliches Regiment)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동시에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까닭에 세상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함께 통치하신다”고 선언한다. 또한 기독교인은 ‘의인이면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 까닭에 두 왕국에 모두 예속되어 있기에 기독교인 역시 사회와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루터는 강조했다. 이상의 여러 견지를 종합해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스콜라신학이 아니라 어거스틴 신학의 재발견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회차 인터뷰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적 배경과 일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 [줌인] '‘⓶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과 신학을 만나다’ – 안동성결교회 이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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