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전 두 청년의 장례를 치른 일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교회 장로님 아들인데 누가 봐도 멋진 모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배가 운전하던 차에 탔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선배는 즉사하고 이 청년은 한 달쯤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숨이 끊어졌습니다. 장례식 치르는 내내 마음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또 한 청년은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간암으로 떠났습니다. 한 주간 금식하면서 매달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가슴 아픈 장례는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후, 아니 교회생활하면서 가장 마음 아픈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학교 교감으로 섬기시는 목사님 부부의 딸이 갑자기 뇌종양으로 쓰러진지 하루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7년 6개월밖에 세상에 살지 않은 유나를 데려가셨습니다. 수요일 밤에는 온 성도가 수술 받고 있는 유나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거절도 기도 응답의 한 방식이라고 설교해왔지만 막상 부딪치니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너무하시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오래전 장례식장 같은 것이 없었을 때입니다. 교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방에 시신을 두고 집에서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마당이나 골목에도 성도들이 가득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이웃집 소년 한 명이 계속 서성이면서 성도들에게 중얼중얼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에게 데려가면 살려낼 수 있는데... 지금 장례 치르면 안 되는데...” 아이는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는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목숨이 한 번 떠나면 끝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했다 하더라도 일단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두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이 한 번 떠난 목숨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반장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6학년 때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의 얼굴이 유난히 하얬기 때문에 아마 어디가 아파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6년여가 지나서 대학교 입학식 때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죽었다던 친구가 저와 같은 대학 신입생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습니다. 다른 친구 한 명과 셋이서 식당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제가 겨우 한 마디 했습니다. “야, 너 죽었다던데.,?” 그 친구가 황당하다는 어투로 대답했습니다. “어느 놈이 그런 말하데?” 

    부활은 유쾌한 반전입니다. 우스운 상상을 해봅니다. 도마는 예수님 부활 소문에 콧방귀를 끼면서 말합니다. “어느 놈이 그런 말하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소문을 보고합니다. “주님께서 기절하셨다고들 합니다. 저희들이 주님 시체를 훔쳐갔다고들 합니다.” 예수님이 일갈하십니다. “어느 놈이 그런 말하데?” 세상에서 유나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합니다. “유나는 7년 6개월밖에 못 살았다네. 정말 안 됐어. 하나님도 너무하셔.” 유나가 예쁜 말 버전으로 대꾸합니다. “누가 그런 말하데요? 저는 천국에 조기유학 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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