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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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당회에서 세례 문답을 했습니다. 할머니 한 분도 함께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질문 자체를 막으셨습니다. “아이고,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세례나 주이소.” 같은 말을 반복을 해대니 목사님, 장로님들이 기가 막혀서 어찌 할 바를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아셔야죠?” 장로님 한 분이 참다못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때도 할머니 말씀은 똑같았습니다. “아이고,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세례나 주이소.” 목사님도 어쩔 수 없이 은혜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와 세례 동창생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그 목사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도 그분처럼 은혜로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은혜로움은 질문 순서로 나타납니다. 여러 명 둘러앉아있으면 대답 잘 하실 만한 분에게 먼저 묻습니다. 첫 사람이 더듬거리면 다음 사람들도 대답을 잘 하지 못하니까요. 

어느 금요일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의 학습문답을 했습니다. 세 분을 휙 둘러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좀 총명해보이셔서 먼저 질문을 드렸습니다. “어르신,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음~하고 뜸을 들이시더니 점잖게 대답을 하십니다. “아, 그분이 하나님 자제분 아니신가요?” 긴장하신 서당 훈장님처럼 반문하시는데 웃음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틀리지도 맞지도 않은 애매한 대답입니다. 자제분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정확하게는 외아들, 독생자라고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이번엔 할머니 한 분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할머니 위해서 무얼 해주셨습니까?” 할머니는 자신있게 대답하십니다. “아, 그거야, 좋지 않은 거시기를 다 없애 버리셨지라.” 좋지 않은 거시기! 정겨운 표현입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맞다고 하기에도 거시기했습니다. 거시기보다는 죄라고 하시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남은 할머니 한 분은 귀가 좀 어둡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귀에 대고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할머니 위해서 무엇을 해주셨습니까?” 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할머님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아, 우리 둘째 아들이 말해서 교회를 다니는 거지. 그전에는 아, 텍도 없었지라.” “아니, 할머니 아드님 말고 하나님 아들...” 역시 제 질문과는 상관없는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당께요. 우리 둘째 아들이...” 이 할머니는 오랜 세월 병약한 77세된 따님을 보살펴 오신 분이십니다. 장한 어머니상도 받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 앞길을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학습 받고 열심히 성경 배우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 로비에서 만날 때마다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머니, 둘째 아들 잘 계시지요?”

그분들도 여러 주 학습 공부를 하셨습니다. 다 까먹으신 겁니다. 다른 어르신들도 공부하고 나면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정신 차려도 금방 까먹습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저도 한 마디 합니다. “성경공부 하신 다음에는 제발 돌아서지 마세요.” 노년의 한계가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성경공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인생살이의 모든 영역에 노년의 한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 잘못해서, 보증 잘못 서서, 자식 사업 도우다가 빈곤하게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뼈 빠지게 일해서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 중병 들어 시한부 판정 받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간절하게 말합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병만 나으면, 주를 위해 살겠다고.. 참 안타깝습니다. 그 좋은 세월, 그 많은 재산, 그 힘, 그 건강, 그 열정, 그 기회 다 날려버리고 나니 주를 위해 사는 것도 한낱 꿈이 되어버립니다.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옛 시조의 종장이 떠오릅니다. 찬송가 575장의 “젊을 때 힘 다하라”는 가사가 가슴을 찌릅니다. 배움도 봉사도 헌신도 충성도 미루지 말고 지금 시작해야 됩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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