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Have a nice day!"가 아니라 "Have an ice day!"입니다. 12년 전 두산리 큰마을로 이사를 들어올 때도 그해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었는데 오늘도 매서운 추위입니다. 그래도 한 낮에 이삿짐을 꺼내어 실릴 것이니 설마 이삿짐이 얼어 붙기야 하겠습니까? 다섯 시간 후면 이삿짐 센터에서 5톤 트럭이 도착해서 이사를 시작하겠지요? 하지만 지금도 글 쓰다 말고 승용차로 가지고 갈 짐을 실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남아공 8년 유학생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짐을 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짐을 싸기를 시작하면 누군가가 전화를 하고, 아니면 딩동~하고 찾아오고 마지막 밤에는 그동안 갖던 성경공부팀들이 함께 모여서 저녁을 먹고 고별미팅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밤 12시가 가까워지는데도 모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우리의 형편을 실토하고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짐을 싸서, 공항으로. 바로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는 유학생 삶,8년을 정리하는 것인데 비해서, 울산은 담임목사로 목회를 했고, 기간도 그 세 배가 넘는 25년의 삶을 살았으니 상황이 어떠했을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찾아오는 분들 때문에, 아내가 짐 싸는 일에 진도가 나지 않는다고 행복한 고민을 하길래, 만나서 차를 마시든지 식사를 함께 하든지 그것도 이사준비의 하나라고 하면서 옛날 남아공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이사를 앞둔 열흘 전부터는 더 이상 식사초대를 집에서 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한 번의 예외말고는 가까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집에서는 커피만 마셨지만 그래도 모두 시간은 들어가는 일입니다. 다만 일거리가 줄어드니 시간뿐 아니라 체력도 절약하는 셈입니다. 이사를 앞두고 한 사람이라도 퍼지면 그것도 난감합니다. 지난 열흘일정을 살펴보니 하루도 손님이 없는 날은 없었고 여차하면 몇 건씩, 이사 전날은 겹치기 출연팀들이 하루 종일 있었습니다. 오셔서 한 시간만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팀은 매우 드문일이고, 식사를 함께 하면, 음식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서너시간은 기본입니다. 

이사준비란 25년의 삶을 간추리는 일이기에 만만치를 않았습니다. 사람관계뿐 아니라 이사짐을 꾸리는 일도 우리의 상황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35평의 주택에 12년을 살다가 23,4평의 아파트에 들어갈 짐으로 간추려야 하니까 수월치를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살림은 어머님의 묵은 장롱부터, 아들의 남아공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린 그림까지, 아들이 그렇게 버리지 못하는 DNA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은 아닙니다. 10대 후반의 일기장까지 저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압니다. 그래서 아내는 1)서울로 가져갈 짐 2)울산에 남겨둘 짐 3)이번 기회에 버릴 짐으로 분류하는 고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우린 4년 후에는 다시 울산으로 이사를 해야 합니다. 물론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직 주인께서 그 선하신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힘든 이사준비를 하다보니 장차올 마지막 이사를 사모하게 됩니다. 죽음의 형태에 따라서 그날은 그동안 관계를 갖고 살던 분들과 미리 만나서 고별을 하는 일은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그 때는 짐을 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 이 땅에 온 것처럼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손에 가득 쥐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관심을 쏟을 일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모든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넉넉히 나누는 일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번 이사를 앞두고 참으로 많은 분들이 아주 자상하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려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때로는 받는 것은 죄악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분들도 그 가운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절하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봉투에 담긴 액수가 적어서’라는 상처를 줄까 거절도 못하고 받으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갚아주시길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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