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은 헬라문화와 더불어 기독교 복음의 선포를 위한 통로들로 제공된 초대교회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기독교 탄생의 역사적 배경이 바로 로마제국이었다. 누가는 그리스도 탄생의 시점을 알리는 시기를 누가복음 2:1에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할 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티베르(Tiber) 강변의 작은 마을국가로 출발했으나 빈번한 정복전쟁과 조약을 통해 대제국을 이루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동쪽으로 페르시아,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북쪽으로는 영국의 서북방까지 확산되었다. 여러 나라들의 해안이 되었던 지중해가 이제는 로마제국의 호수처럼 보일정도의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로마제국의 문화적 특징은 실용주의이었다. 헬라의 지성적인 문화를 융화하면서 대제국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실용주의 문화를 꽃 피우게 되었다. 제국의 중심부는 정치의 중심지인 로마시였으며 권력은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다. 특히 100여 년 동안 계속된 내란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하여 아우구스투스(augustus)란 칭호를 받고 황제로 옹립되었는데, 그의 통치기간 중에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오시게 되었다. 

1) 기독교 선교의 도구가 되었던 교통과 통신 문화 

20세기 영국이 낳은 역사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을 싣고 가는 배는 유럽을 싣고 가는 배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바울사도 한 사람의 선교적 열정이 지중해 세계의 정신문화를 기독교화 시켰다는 역사해석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울의 선교를 가능하게 한 문화적 도구는 로마의 '실용주의 문화'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된 때로부터 200여 년 동안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이룩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대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가져왔다. 견고한 고속도로들이 거미줄처럼 건설되었다. 그래서 생긴 유행어가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었다. 로마의 신속한 교통수단의 개발은 복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파되는데 큰 몫을 담당하는 도구가 되었다. 

2) 법률의 발달과 로마의 선교 

선교전략가이기도 하였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선교는 그의 최고의 비전이었다. 당시 정치, 군사, 교육의 중심지인 '로마의 복음화는 곧 전 유럽의 복음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당국과 유대종파 양쪽 모두에게서 핍박을 받고 있었다.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숭배를 반대하는 신흥종교지도자로서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유대종파에서는 배신자이며 변절자로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고 신비하였다. 사도바울은 로마제국의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국비로 로마에 입성하게 되었다. 로마의 시민권 소유자였으므로 본국에 가서 재판받기 위함이었다. 로마의 법의 발달이 바울 사도로 하여금 로마선교를 가능하게 하였다. 바울 사도의 로마선교의 핵심은 '로마서'기록을 통한 문서 선교에 초점이 맞추어있다. '로마서'는 훗날 신약정경이 되었으며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구원의 진리의 명확한 해석서가 되었다. 
신학자 바울은 로마제국의 법률구조를 이용하여 그 유명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즉 이신칭의 교리는 법률문화 속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진리이다. 원래는 죄인인데 죄의 값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속죄 받았음으로 그를 믿는 성도는 이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교리이다. 보석금 즉 속전으로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죄의 형벌로부터 탕감을 받아, 의롭다고(즉 죄가 없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법의 논리를 이용하여 기독교 구원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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