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찾아온 구원의 확신
어느 나라든 들어갈 수 있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
매년 일주일 병원문 닫고 직원들과 의료선교 떠나
한국에서는 생소한 네트워크 병원 시스템 구축

선교사가 꿈이었던 한 청년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나라든 의사는 필요한 직종이었기에 출입국이 자유롭겠다는 생각에서다. 바로, 포에버네트워크 정해진 대표원장의 이야기다. 매년 일주일은 병원문을 닫고 의료 선교를 떠난다는 그. 정대표의 인생에는 어떤 발자국이 남았는지 대화를 청했다.

포에버네트워크 정해진 대표원장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포에버네트워크 정해진 대표원장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삶의 시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의 사랑에 젖어
의대 진학 실패 후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들었지만,
재수 시절 더 많은 것 준비하신 하나님 만나

Q. 하시는 일은?

병원이니까 진료 하고 있죠(웃음). 진료 영역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예뻐질 수 있는 요소요소 모든 항목들입니다. 그 항목들을 잘 찾은 후 치료를 통해 환자분께서 삶의 활력소를 다시금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일. 뭐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는데 그냥 열심히 제 꿈을 생각하며 돈 벌고 있어요(웃음).

피부과 시술 중인 정해진 대표원장
피부과 시술 중인 정해진 대표원장

Q. 하나님과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따라 교회에 간 게 시작이었어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때부터는 고향 교회를 떠나 전주에 있는 재언교회에 출석하게 됐어요. 저를 지도해 주셨던 담당 선생님, 그리고 저희 지도 목사님, 그리고 저희 담임 목사님 이 세 분이 저에게 큰 영향력을 주셨던 게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때 예수님을 많이 만났었고, 많이 알아가고 깨달았던 것 같아요. 삶의 비전도 새롭게 찾게되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그 시절부터 그냥 나도 모르는 비에 계속 젖었는데, 어느 순간 흠뻑 젖게 된 것 같아요. 

Q.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사건은?

힘들었던 사건이 몇 가지가 있어요. 그중에 생각나는 한가지는 의대에 떨어졌을 때. 그때는 진짜 좀 속상했었어요. 의대에 진짜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학교 생활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도 진짜 열심히 했어요. 단순히 의사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꼭 의대에 보내달라고 기도했었거든요. 막상 떨어지고 나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 있죠. 열심히 선교하겠다는데 하나님, 정말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하는 그런 느낌?

Q. 어떻게 극복했나?

당시엔 하나님께 너무 서운하고 그래서 그냥 무작정 보따리 싸고, 혈혈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와 버렸어요. 혼자 자취하면서 종로학원에 다녔는데 하나님께서 또 다른 방법으로 많은 것을 준비해놓으셨더군요. 학원에 그렇게 큰 기도모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학원 내 기도 모임에 참석하면서부터 신앙적으로 신실한 친구와 선배들을 많이 만났어요. 주로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모여, 30여 명 정도가 50분 정도 함께 기도했어요. 선배들이 참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전년도에 학원에서 공부해 각각 대학에 진학한 선배들이 학원 후배들을 잊지 않고 주말마다 찾아와 함께 예배하고 기도했던 모습들. 조를 나눠 말씀도 나누고, 선교단체 간사님을 초청해 메시지도 듣고 하면서 저희들을 멘토처럼 섬겨주셨어요.

Q. 원하던 의대에는 합격했나?

네. 그랬죠. 그 해에 합격했습니다(웃음).

Q. 가장 행복했던 때는?  

행복했던 순간들은 참 많아요. 아내를 만났을 때, 결혼,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Q. 가정에서는 어떤 아빠, 어떤 남편이세요?

그건 저희 아내하고 저희한테 물어봐야 할것 같고요(웃음). 아이들한테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내가 힘들고 고민이 있을 때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빠이고 싶은데, 현실은 애들이 고민을 막 털어놓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이들 말을 들어주고 좀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매일 같이 있는 엄마하고 주말에만 같이 있는 아빠는 친밀도 자체가 좀 다른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잔소리하는 엄마의 탈출구가 되는건 확실한 것 같아요(웃음).

2012년 네팔 카트만두 거리에서 찍은 정해진 원장 가족사진
2012년 네팔 카트만두 거리에서 찍은 정해진 원장 가족사진

Q. 가족과 떨어져 지내시나 보네요.

네. 직장은 서울, 집은 제주예요. 그래서 주말에만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어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게 너무 싫고 함께 지내고 싶은데, 아직은 그럴 상황이 못돼요. 사실은 떨어져 지내게 된 계기가 "1년만 좀 제주에 살아보자"라는 것이었어요.

제주에 살아보자라고 했던 결정적 계기는 서울에 상경해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비즈니스라는 걸 전혀 해본 적이 없는 터라 되게 불안하잖아요. 목돈도 들어갔고. 여기서 내가 좀 잘못되면이제 우리 가정이 전체적으로 힘들어지니까 되게 열심히 일 했어요.

내 나름대로는 일단 병원을 잘 끌고 가야 우리 가정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6~7년 지나고 보니까 가정은 가정대로 나한테 서운해 하고, 나는 한다고 했는데 '왜 서운해하지?' 정말 어느 한순간도 안쉬고 열심히 일했는데 나도 서운한 거예요.

그런데 불현듯 어떤 현타가 오냐면, 큰애가 3학년 둘째가 1학년이 됐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 아이들이 한 5-6학년쯤 되면 '아빠랑 놀까? 친구들이랑 놀지 않을까?' 그럼 내가 시간들을 함께하면서 부대낀 기억이 얼마나 있나 돌이켜봤더니 내 기억에도 별로 없고 얘기하기도 별로 없을 것 같은 거예요. 겨우 주말에 조금 놀아준 정도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되게 위기감이 오더라고요. 스스로가 얘가 나중에 커서 "아빠는 일만 했잖아"하고 아이들과 추억도 없으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은 거예요.  이게 지금 전부가 아니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최대한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으로 결단을 했죠.

Q. 지금 제주에 살게 된 계기의 '제주살이' 1년 동안, 가족 관계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제주에 내려가서는 삼시세끼를 같이 먹고, 그냥 뒹굴고 같이 놀았어요. 딱지도 치고, 함께 비 맞고, 자전거 타고. 제주에서의 1년은 아이들과도 아내와도 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됐어요. 아내와 21살 때부터 교제를 시작해서 6년을 만나고 결혼해서 올해로 16년차가 됐는데, 그러다보니 이제는 서로 이해의 폭이 많이 커진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과 온종일 지내보면서 일주일 동안 혼자 아이들을 케어해야하는 아내가 얼마나 힘들까 알게됐고 이 생활을 10년 째 하는 아내가 존경스럽기까지 해요. 그런데 아내도 비슷한 생각을 하더라고요. 우리 남편이 월요일에 새벽 4시에 출근하려면 얼마나 고생할까하는. 이런 이해의 폭이 넓어지니까 더 사랑하게 되더라고요. 농담처럼 얘기하는데 결혼 후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3년 내외 기간 동안 우리 부부는 제일 뜨겁게 사랑한다고 해요. 애들이 다 커서 그런가(웃음).

사역의 시선

선교 위해 '의사' 되기로 결심
동아리 만들어 기도하며 '선교병원' 계획
일주일 병원 문 닫고 직원들과 의료선교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깨달아

Q. 가운데 느끼는 하나님이 손길이 있는지?

많이 느끼죠. 사실 돌이켜보면 순간 순간 개입하셔서 도우시고, 나로 하여금 난관들을 이겨나가게 하셨는데 그 순간에는 잘 안 느껴져요. 저는 극히 세상적인 일을 하거든요. 그렇게 세상적인 일을 하다 보니까 자꾸 세상적으로 돼요. 그러다가 또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고. 계속 반복이더라고요.

그래서 기자님께서 던지신 사역에 대한 질문을 받고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왜냐하면 순간순간마다 기도하면서 이 병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좀 부끄럽더라고요. 하지만, 하나님께 늘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있어요. 학창시절 주신 선교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고요.

2010년 필리핀 바콜로드 의료선교에서 진료 중인 정해진 원장
2010년 필리핀 바콜로드 의료선교에서 진료 중인 정해진 원장

Q. 2010년부터 의료선교를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병원문을 닫았어요. 주변에서 다들 미쳤냐, 드디어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했었죠. 보통은 부원장에게 책임을 일임하고 병원은 계속 운영하는데 아예 병원 문을 닫았으니 주변 분들이 더 걱정하더라고요. 한 달에 일주일을 쉬면 대표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건 사실이에요. 수입은 줄지만, 임대료와 급여 등 지출은 똑같거든요. 처음엔 그런 상황들이 되게 무서웠어요. 결국 의대가 가고 싶었던 건 의료 선교를 하고 싶어서였고, 의료 선교를 안가면 뭔가 마음에 자꾸 미련도 남아서 한번 미친 척하고 갔다왔어요. 그런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 예전에 주셨던 마음이 바로 이거였어!" 함께 간 직원들도 느낀 게 너무 많았다고 얘기도 하고.

2012년 포에버네트워크 직원들과 함께 한 네팔 의료선교
2012년 포에버네트워크 직원들과 함께 한 네팔 의료선교

Q. 병원 운영에는 타격이 없었나?

갔다 오니까 오히려 병원도 더 잘되는 거예요. 병원 문이 닫혀 못왔던 환자분들에 다음 주에 다시 오시더라고요. 결국엔 일주일 동안 와야 하는 사람들이 다 오셨어요. 그러다보니 소문도 좋게 났어요. 일주일씩 문닫고 해외 빈국에 의료선교를 다녀오니까 괜찮은 병원, 괜찮은 원장이라고(웃음). 환자분들이 다른 환자분을 막 모셔왔어요. 어쨌든 나중에 한달 수입을 계산해보니까 의료 선교를 갔다온 달이나 안갔다온 달이나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확신을 갖게 됐죠. ‘해보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다 채우신다.’ 그런 확신이 생기니까 미련 없이 병원문 닫고 떠납니다. 직원들도 일주일은 3일은 자기 연차로 쓰면서까지 다녀오려고 해요. 코로나가 터진 후에는 의료선교도 중단돼 많이들 아쉬워해요. 지금도 언제 가냐고 계속 물어봐요. 직원들이.

포에버네트워크 직원들은 매년 일주일 가량 의료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포에버네트워크 직원들은 매년 일주일 가량 의료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Q. 의료 선교사는 되고 싶으셨는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서 성경 공과공부를 하면서 삶의 방향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예수님를 위해 살아야 된다'라는 큰 명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의료 선교가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의료 기술은 어느 나라나 다 필요한 부분이잖아요. 어느 나라든 출입국을 거절당하지 않겠다 싶었던 거죠.

Q. 선교사 훈련도 받으셨다고.

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으면서 나는 어떤 민족, 어떤 나라로 가서 섬길까를 고민했었죠. 처음 방문했던 선교지가 우즈베키스탄이었어요. 3주 정도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땅밟기하면서 같이 기도했어요. 우리 아내는 티벳. 이제 선교의 비전들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고민했죠. 또 의료인들 중심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같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주마다 여러 민족과 종족들을 연구하면서 기도했지요.

Q. 동아리에서는 어떤 계획들이 나왔나?

의료 선교의 시스템에 대해 많이 얘기했어요. 선교에 비전이 있는 친구들이 모였으니까 우리는 다 같이 의사가 되고, 병원을 설립하고 돈을 벌 수 있으니 함께 선교병원을 만들자. 우리 중에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동료가 있으면, 병원을 운영하는 동료들이 그 선교사를 전적으로 서포트해주자. 그럼,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에요. 아직은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지 못하지만, 생각을 나눈 후배들과 함께 선교를 다니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어요.

Q. 선교병원의 시작이 될 포에버네트워크(병원) 소개를 부탁한다.

사실 병원을 네트워크 개념으로 간다는 자체가 좀 희안한 구조에요. 우리나라의 병원 개념은 영리가 목적이 아니에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병원을 사업이나 비즈니스 모델로 보진 않아요. 예를 들어, 제가 편의점 사장인데 다른 편의점을 인수하면 회사가 두 곳이 되잖아요? 그런데 병원은 한 곳밖에 안 되요. 한 사람이 한 곳 밖에 운영을 못해요. 그리고, 혹시라도 어떤 분이 병원에 거금을 투자해서 수익금을 배당받고 하는 것도 안되요. 우리가 네트워크 시스템을 만든 목적은 솔직히 말해 병원의 생존이었어요. 병원이 의외로 홍보비가 많이 들거든요. 우리는 한달에 1~2억씩 투자할 역량이 못되니까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분담하자는 생각이었죠. 결과론적으로는 현재 30개 정도의 브랜치를 갖고 있는 네트워크 병원으로 성장했어요. 저같은 사람이 대표로 섬기고 있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요. 이렇게 쭉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간섭이셨어요.

포에버네트워크(강남점)에서 정해진 대표원장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포에버네트워크(강남점)에서 정해진 대표원장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Q. 많은 사역과 일들을 감당했는데, 자신의 달란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10년 동안 병원을 하면서 사기도 당하고, 병원 문 닫기 직전의 상황까지도 가봤고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는데, 그런 상황 가운데 굉장히 의연해요. 주변에서는 "나라면 그 상황에 정신 병 걸려서 죽을 것 같아. 신경쇠약에 말라죽을 것 같아"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답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진짜 괜찮아지더라고요. 어떤 상황이 생기면 약간 긴장은 되는데 지금까지 쭉 지내온 걸 보면 이 또한 지나가고, 여기서 조급해하고 힘들어한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 하나도 없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풀어 나가는 게 오히려 현명한 거니까요. 어떤 상황가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태도와 마음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귀하고 큰 달란트 인 것 같아요.

생각의 시선

Q. 요즘에 많이 하는 생각은??

'코로나가 언제 끝날까..' 병원이 강남에 있다보니 매출의 30% 정도는 해외 환자분들이에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해외 환자분들이 병원에 못오시는 수입의 30%가 그냥 줄었어요. 국내 환자분들도 코로나19로 인해 병원에 잘 안오시려하고. 피부과라는 병원이 좀 그런게 있죠. 환자분들이 코로나 시국에 굳이 피부 관리 받으려고는 안하시거든요. 거의 수입이 반으로 줄었어요. 하루빨리 이 상황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1년 반이 다 되가네요. 아무래도 이 생각을 제일 많이하게 돼요.

Q. 나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지금은 원로목사가 되신 재언교회 임종학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학창시절부터 그분의 메시지를 들으며 꿈을 키웠으니까요. 그리고 가치관에 영향을 준 구절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목표처럼 생각하고 있는 말씀이 있어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24절. 평생 내가 붙들고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야지 라는 목표와도 같은 말씀이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정해진 원장이 인생의 목표로 삼은 말씀

ㅣ세상의 시선

경쟁과 비난이 난무하는 세상 안타까워
순수함이 회복되는 세상 됐으면..

Q.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예전 양희은씨가 부른 '작은 연못'이란 노래가 자꾸 생각납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기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븐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속에 붕어두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속에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양희은의 <작은 연못>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노력 보다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비난과 비난이 꼬리를 물고 누군가가 없어져야 그 비난이 멈추는 듯한 분위기. 결국 함께 살아내지 못하면 모두 불행해 질 텐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Q. 왜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긍휼함 보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들이 가득하게 되어서 이런 결과들이 자꾸 생기는 듯해요.

Q. 변화했으면 하는 세상의 방향은?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Q.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때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으면 하는지?

청년의 시절의 나의 이상향은 이삭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조금은 바보 같지만 그냥 내껄 조금 손해 보면서 이 평화를 지켜갈 수 있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바보같은 용기?
지금도 그런 순수한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Q. 한가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꿀 것인가?

미세먼지, 황사, 서울의 교통체증도 없애고 싶고, 집값도 잡고 싶어요. 세계 분쟁 지역들도 없애고, 최소한 굶어 죽는 분들도 없으면 좋겠어요. 또 여러가지 등등 많지만, 가장 큰 바램이 있다면 사람들 마음의 순수함들이 회복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조금은 동심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순수함을 갖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모두에게 있는 그런 세상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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