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여성들은 성희롱과 성폭력에 관한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남자들이 들으면 ‘그게 실화냐’고 눈이 똥그래지는 성폭력의 경험들이, 여자 둘만 모여도 쉼 없이 쏟아진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편집장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편집장

여고 시절, 지각하면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는 남선생이 있었다. 지각 버릇을 고쳐주려 그런다고 했다. 지각과 브래지어 끈이 대체 뭔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잘못을 했으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속바지를 입었는지 검사하겠다며 지휘봉으로 교복 치마를 들추는 선생이나, “공부하느라 힘들지” 하면서 귓불을 만지는 선생 앞에서도 그저 몸을 움츠리기만 했다. 남성이자 어른이자 선생인 그의 권위에 눌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상상조차 못했다. 못 견딜 정도로 기분이 더러울 때는 뒤에서 “그 자식, 변태야” 하면서 힘없는 우리끼리 선생을 욕하는 게 전부였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살면서 밥 먹듯이 겪게 될 성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내게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들의 행위가 성희롱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몰랐다는 건, 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의 무지는 교사가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인권을 중시하고 학생을 존중하는 대안학교 교사들도 젠더 문제에서만큼은 한참 뒤처져 있었다. 여학생들의 속옷을 감추는 남학생의 행위를 ‘짓궂은 장난’으로 생각했고, 늘 어리게만 보던 남자아이가 컴퓨터실에서 야동을 보다 들켰을 땐 ‘벌써 그럴 때가 됐나’ 하면서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n번방 사건을 지켜보며 분노와 함께 심한 자책의 마음이 들었다. 교사로서 나의 무지가 이 사회의 비뚤어진 성인지 감수성에 일조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n번방을 최초로 개설하고 운영한 문형욱(텔레그램명 ‘갓갓’)은 범행 목적을 묻자 “잘못된 성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미리 준비한 답일지라도 그냥 흘려들을 순 없었다. 교묘하고 악랄한 수법만큼이나 충격을 안긴 건 26만명이라는 가담자 수였다. n번방에 분노하는 우리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2년 전, 한 남고생이 여성혐오와 음담패설로 얼룩진 10대 남자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민들레’에 공개했다. 독자들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적나라한 글을 지면에 실은 것에 불편을 표하기도 했으나, 나는 안다. 그들의 말이 오늘의 n번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n번방은 하나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문화적 현상’의 일부다. n번방과 유사한 사건 혹은 그의 시발점이 되는 잘못된 성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지탄하기 전에 부모로서, 교사로서, 시민으로서 자신의 젠더의식을 샅샅이 성찰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뼈아픈 후회와 반성으로 강력한 갈등과 균열과 전복을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문화는 균열을 전제로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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