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1913-1951년)이란 역사가가 있습니다. 학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쩌다 내가 손에 쥐게 된 <역사 앞에서>(1993년, 창비)와 <고쳐 쓴 한국역사>(1994년, 앞선 책)란 그가 쓴 책들 덕분입니다. 두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빼어난 글 솜씨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탁월한 재간을 느꼈습니다. 아마 그 자신의 사려 깊은 생각과 품은 의지를 요령 있게 정리한 덕분일 것입니다.

  <고쳐 쓴 한국역사>는 김성칠이 1946년에 집필한 <조선역사>를 말 그대로 맞춤법을 고쳐 새로 정리한 책입니다. 해방 직후에는 변변한 우리나라 역사책이 없었습니다. 설사 있더라도 한문투성이어서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멀리 존재하였습니다. 평소 읽을 만한 국사책이 없음을 딱해하던 김성칠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변변한 출판사가 아니라, 그가 일하던 금융조합에서 출간했습니다. 저자가 정식으로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올린 해는 이듬해 1947년으로, 서울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막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젊은이들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일은 그 시대 역사가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일본식 군국주의교육은 우리 역사는커녕, 조선 사람에게 자기 민족에 대한 모멸과 수치심을 주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김성칠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함이 학문하는 태도에 있어 신중치 못함이 아닐까 하고 주저되기도 하나 일본말책 대신 아무 것도 읽을 것이 없어서 재미없어하는 소년들에게 이 초라한 선물이나마 보낼 수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고 썼습니다.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근세사 편중 ‘조선의 쇠망’ 부분인데 역사가의 진단이 매섭습니다. 게다가 그 표현이 역사서술이전에 문학적입니다. 
  “백성들은 나라의 추렴이 많은데 관리의 토색까지 겹들어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히 살림 살아서 볏섬이나 쌓아놓으면 서원과 양반이 애매한 죄를 얽고, 또 아전의 농간이 일을 더욱 버르집어서 재산을 잃어버림은 물론이며 매까지 얻어맞게 되므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모든 산업이 오그라들고 나라의 모습이 말 못 할 형편에 이르렀다”(김성칠의 고쳐 쓴 한국역사, 212쪽).

  저자가 5천년 조선역사 중에서 상고사는 물론 근세사 중 ‘망국과 독립’을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소상히 서술한 배경은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의식의 자각과 회복, ‘남의 역사’를 극복하여 새 나라를 세우려는 반성과 열망의 반영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대목에는 해방 75년에 이른 지금도 새겨들을 만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조선 사람이 다시 조선 말년의 잘못을 되풀이해서 (미국과 소련 등) 큰 세력에 현혹하여 제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사대주의로 그를 섬기고 체면을 돌보지 않고 이에 빌붙어서 치사스러이 자기 당파와 자기 개인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민족 100년 대계를 그르쳐서 천추만대의 자손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위의 책, 235쪽).

  김성칠의 염려는 얼마가지 않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역사 앞에서>가 그 증거입니다. 분단의 현실을 “조선사람의 내부에 필요 이상의 사상적 분열을 일으켜서 조선의 통일과 발전에 한 가닥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게 되었다”는 근심이 결국 현실화 된 것입니다.

  김성칠의 일기(1950년 1-12월, 1951년 3-4월)는 역사가 이전에 한 개인이 체험한 6.25에 대해 실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전쟁이란 현실 속에서도 지속된 생생한 일상은 미시(微時)사로서 역사의 의미와 생활(生活)사로서 역사의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전쟁 이면에 존재하는 전쟁의 풍경과 전선(前線)이 아닌 일상의 전선에서 맞이하는 그날그날의 불안으로 엮어간 단편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한국전쟁 70년을 맞았습니다. 이번 주간에 나는 <역사 앞에서>를 다시 펼치면서 젊은 역사가의 근심어린 시선에 잠잠히 눈을 맞추어 볼 참입니다. 전쟁 중인 1951년 고향 영천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까닭에 그가 이념적 편견이나 편향의 잣대로 규정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직한 염려 가운데 남북 사이에 끊어진 길 위에서, 또 다시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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