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S뉴스 박혜선 기자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울산 월평교회, 올해로 설립 112주년을 맞았다.

울산 월평교회는 1909년 3월 8일, 호주 왕길지 선교사가 전읍교회 이기연 성도와 함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시작됐다. 이후 경주교회 김희조 성도가 연보한 150원으로 월평교회 예배당을 구매했으며, 두 차례의 이전 과정을 거친 후 1980년부터 현 위치에 자리잡았다.

월평마을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마을 거부이자 학자인 우영식 씨이다. 그는 갖은 핍박 속에서도 웃으며 복음을 전하는 왕길지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이후, 우영식씨의 처 이남전 씨와 자녀들, 일가친척들까지 복음이 확장됐다.

박대우 목사 / 울산 월평교회
저희 월평교회는 1909년도 왕길지 선교사님을 통해 복음을 받고 일제시대에도 우상숭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6‧25전쟁 속에서도 신앙의 정결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한 교회입니다.

전종철 장로 / 울산 월평교회
6명의 순교자룰 배출한 만큼 월평 지역의 믿음의 본이 되고자 4-50명의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전 지역에 남로당 계열의 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울산지역 서부 5개면(두동, 두서, 삼남, 상북, 언양)에 자리잡은 공비들은 신불산, 가지산, 치술령에 아지트를 구축했고, 치술령 아래에 있던 월평교회는 그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4월 13일, 월평교회를 향한 공비들의 첫 피습이 시작됐다. 경주교회에서 봉사하던 우두봉 집사(우영식 씨의 셋째 아들)가 잠시 월평 고향집에 들렀을 때 공비들이 습격해 그를 마을 회관 앞마당으로 끌어냈다. 공비들은 ‘예수를 믿는다.’라는 이유로 우두봉 집사를 사살했고, 그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2년이 지난 1950년 2월 25일, 공비들의 2차 습격으로 우재만 집사가 순교의 길을 걸었다. 순교자 우재만 씨는 지역 유지로 명망이 높고, 월평교회 교인 중에서도 신앙심이 투철해서 공비들의 처형대상이 되었다. 공비들은 우재만 집사의 집을 습격해 그를 포승줄로 묶어 잡아갔고, 부인 최재선 권사는 남편을 향해 울부짖으며 “성도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두려워 마이소!”라고 외쳤다. 부인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끌려나간 그는 담대하게 월평교회 앞 저수지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같은 해 6월 30일, 공비들은 월평교회 예배당을 피습했다.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던 정두란 집사와 조재연, 조말복 성도가 세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교회 마당에 끌려 나온 정두란 집사는 공비들의 협박 속에서도 “예수 믿고 천국 갑시데이.”라고 복음을 전한 후, 눈물로 찬송가 338장(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며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다음 해 추석 8월 14일, 공비들의 4차 습격으로 인해 우재만 집사의 동생 우성만 집사가 마지막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월평교회에서 총 6명의 순교자가 배출됐다.

우재석 장로 / 울산 월평교회
우리 후손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믿음을 보고, 바로 죽음 앞에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신 할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본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순교자 되신 우재만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광웅 장로 / 울산 월평교회
그만큼 뼈아픈 시절을 지나고 지금까지 자라 온 것도 그 당시에 순교한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믿음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2010년, 100주년을 맞은 울산 월평교회는 100주년 기념비와 순교비를 설립했으며, 201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에 의해 순교자기념교회로 지정됐다.

이수형 집사 / 월평교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100년이 넘게 우리 교회를 지켜주시고,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우리 월평교회. 우리가 그 신앙과 정신을 본받아서 앞으로 충성된 일꾼으로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울산 월평교회, 월평교회 교인들의 헌신과 순교 정신을 본받아 대한민국의 부흥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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