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작품 ‘피에타(Pieta)’ 상이 있다. ‘피에타’는 이태리어로 ‘동정(pity)’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내린 후 안고 비통에 빠진 마리아의 모습을 놀랍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단 1년 만에 완성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작품이다. 이에 더하여 마리아의 얼굴에서 발산하는 두 가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슬픔’과 ‘평화’이다.

마리아의 슬픔은 자신의 몸을 통해 낳은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또 다른 모습은 더욱 놀랍다. 그것은 바로 평화이다. 이것은 마치 고통의 시간 후에 피어나는 부활의 꽃처럼 놀라운 소망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기 위해서는 주님의 죽음이 전제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제3시(아침 9시)부터 3시간이 지난 제6시(오후 12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9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성부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또한 그 어두움은 하나님의 슬픔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에 달린 것을 도저히 바라보실 수 없어 슬퍼하며 얼굴을 돌리신 것이다.

어떻게 삼위일체의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아버지와 아들이 갈라지는 것이 가능했을까?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출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럼, 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런 버림을 받으셨을까? 바로 나의 죄 때문이다. 그 죄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과 아들이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을까? 존 칼빈(John Calvin)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로, 원래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었다. 칼빈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주님이 그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마땅히 지옥의 죽음을 당해야 하는 자들이란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거울이 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작품 ‘피에타(Pieta)’ 조각상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작품 ‘피에타(Pieta)’ 조각상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시고자 저주의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온갖 모멸과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묵묵히 참으셨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어 결국 운명하셨던 것이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져 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이 있었다. 특별히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의복에는 방울이 있었고, 그의 몸에는 끈을 매달아야만 했다. 만약 대제사장이 이곳에서 잘못하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제사장들이 줄을 잡아 당겨서 빼내야 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그런데 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두꺼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버린 것이다. 휘장의 두께로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결코 찢어질 수 없는 이적 중의 이적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도량형으로 따지면 약 9.34㎝정도 되는 두꺼운 천인데, 그것이 찢어진 것이다. 이 성전의 휘장이 찢겨짐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상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성전 휘장의 찢겨짐은 하나님의 아픔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처절하게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피에타’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완전히 두 조각으로 찢어지셨다. 그 두꺼운 천이 찢어질 만큼 하나님의 아픔은 우리가 가진 어떤 계량기로 측량이 불가능하다.

필자는 여기서 이런 있어서는 안 될 말 같지도 않은 묵상을 한 번 해 보게 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픔과 분노를 인간에게 부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두께 9.34cm를 찢으실 하나님의 분노 앞에 십자가를 향해 저주의 말을 내뱉었던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니 ‘나’라는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묵묵히 참으셨다. 이것이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의 첫 번째 의미인 것이다.

둘째, 성전 휘장의 찢겨짐은 모든 벽을 허무는 평화이다. 즉,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에서 보여주고자 한 평화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면서 하나님과 인간을 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을 없애셨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인간 대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어떠한 제물을 통하지 않고도, 내가 가진 신분과 외적인 조건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성전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평화가 일어남을 보여준다.

또한 이 평화는 하늘과 땅의 평화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만물 사이에도 일어나게 된다. 죄로 인한 상처와 갈등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세계를 철저히 파괴시켜 버렸다. 주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이 땅의 모든 갈등과 분쟁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참된 평화를 주신 것이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3-14)

주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이 길은 물론 힘든 길이지만 또한 영광의 길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넘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이제는 저주의 십자가가 아닌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평화의 십자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버리시는 아픔을 겪으시며 우리를 향해 기대하시는 평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 결과 우리가 속한 곳에 내가 들어가면 죽음이 생명으로, 다툼이 평화로, 갈등이 화해로 바뀌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 그리고 이 슬픔을 넘어서는 아들 되신 주님이 이루신 평화를 묵상하며 참된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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